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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기다리며] 이야기 소묘 - 2006년 03월 09일 14시 40분
2006년 03월 09일 14시 40분 2006년 03월 09일 14시 40분
스피커로 노래가 하나 풀려나오고 있다.
퍽이나 오래 된 노래. 아마 10년 가까이 된 노래이리라.
케이스를 뒤집어 인쇄날짜를 본다. 94년 5월.
지하로만 숨어다니던 노래가 심의를 통과하고 녹음이 되어 대형 유통사에 의해 정식으로 발행이 된 것이 벌써 3년 전의 이야기이다. 그 3년이란 시간.
케이스를 내려놓고 책상 밑으로 다리를 뻗는다. 한참동안 구부리고 있던 무릎에서 뼈마디 꺾이는 소리가 난다. 이젠 질릴 때도 되지 않았나...
바로 여섯 시간 전에 나는 종로바닥 한가운데에서 술을 먹고 있었다.
그들은, 분명 6년 전 같으면 관심 밖으로 돌렸을 그런 얘기들을 했다. 그리고 그들 속에는 나도 끼어있었다. 시간이 지난 탓이야, 라고 한 마디로 간단하게 치워버릴 수만 있다면. 차라리 시대착오라든지 망상증이라고 치부해버리는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러나 그들은 애써 피하고 있었고 나 또한 그러했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나를 포함한 그들을.
종로에서 술을 먹은 우리는 붐비기를 그만둘 줄 모르는 종로 거리로 다시 나와 방금 나온 술집 앞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소리소리 고함을 질러대던 녀석, 술집 앞에다가 토사물을 쏟던 녀석, 질질 짜던 녀석, 그런 녀석들에게 붙어 혹은 달래고 혹은 어울리던 녀석, 그리고 그들에게서 떨어져나와 멀찍이서 그런 모습들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녀석. 집이 서울인 녀석들과 오늘은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뻐대기는 녀석들을 놔두고 먼저 인천행 전철에 올라탄 나를 포함한 몇몇은 그날따라 유난히 더 흔들리고 붐비는 전철 구석에 정신과 육체를 한꺼번에 포개어 말아놓고 한숨들을 쉬어댔다.
"우리 지금 어디 가고있는 거지?"
빽빽하게 들어선 사람들을 피해 연결통로 바로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졸던 한 녀석이 퍼득 놀라며 깨어나더니 밑도 끝도 없는 소리를 질러댔고, 어느 정도 취해있던 우리들은 모두 녀석을 돌아봤다.
"우리 지금 어디 가고있는 거냐고!"
그러나 아무도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북적이던 사람들이 한바탕 썰물처럼 열린 전철문으로 빠져나갈 때 녀석은 내릴 역이 아님에도 그 사람들 속에 섞여 사라져버렸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나를 포함한 그들을.
전철에 남은 우리는 한숨을 그치지 않았다. 어쩌면 한숨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남아있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첫닭이 홰를 치고 울 때가 방금 지났다. 나는 책상 밑으로 쭉 뻗었던 다리를 거두어들이며 책상 위에 박고있던 고개를 든다.
빌어먹을 시기야. 안그래? 과도기 치곤 惻つ“?긴 것 같아. 과도기가 맞긴 맞아? 누가 그래? 과도기라고? 젠장, 이따위 시대에 태어나서 살아가야 한다니, 갑자기 우리 부모님이 미워지는데? 병신, 너는 아마 원치 않았던 자식이었는지도 몰라. 그러니까 요모양이지. 그러는 너는? 사돈 남말 하시네.
문득 책상 서랍에 들어있는 양초가 생각난다. 보름 전쯤 집이 비었냐며 쳐들어온 그들이 사다놓고 간 양초. 그들은 가지고 올 때처럼 갈 때도 모두 거두어 갔지만 선심 쓴다고 하나를 남겨놓고 갔었다.
두터운 국어대사전을 책상 위로 올려놓고 양초를 꺼낸다. 방의 불을 끄고 라이터로 양초에 불을 붙여 사전 위에 떨어뜨린 농 위에 양초를 세운다. 그리고 잠시 흔들거리는 촛불을 바라본다.
새삼, 오랜만이라는 기분이 든다. 아마 사춘기 이후론 처음일걸. 촛불이 벽과 천정에 쉴 새 없이 그려대는 추상화는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마치 애드거 앨런 포우의 단편소설같은 분위기야, 방금 죽음에서 깨어난 여인이 내 등 뒤에서 다가오고 있을지도 모르지. 한편으로는 기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선정적이야. 이 유령같은 시대엔 이렇게 유령같이 사는 게 어쩌면 맘 편할 수도 있겠군, 젠장!
이젠 술이 거의 다 깼다. 겨울의 새벽공기가 방 안에까지 스며들고 있는지 몸이 싸늘해진다. 허기까지 돈다. 옷걸이에 걸린 티셔츠를 끌어내려 입고 방문을 열어본다. 집안은 괴괴하다. 아직도 해가 뜨려면 한참을 더 있어야 한다. 냉장고 안에는 반찬거리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 어쩔 수 없이 한상 차려 먹어야한다. 어두운 속에서 이리저리 더듬으며 간신히 찬밥그릇을 찾아 수저와 김치그릇과 함께 방으로 가지고 온다.
촛불 밑에서 밥을 먹다니, 제법 낭만적일 수도 있겠는데? 취기가 가시고 찾아온 허기라 찬밥 한 그릇이 금방 바닥을 드러낸다. 다 먹은 그릇을 치우고 촛불로 담배불을 붙여문다. 조금 후엔 식곤증이 찾아오겠지. 겨울날 새벽에 식곤증? 웃음.
마지막 노래소리가 멀리로 달아나고 곧 조용함이 밀려온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자동차의 엔진소리가 방안의 따스함을 찾아든다. 어디선가 개가 짖는다. 지나친 조용함은 오히려 불안감을 자극한다. 창틀 사이로 바람이 드는지 촛불이 한 번 세게 흔들린다. 이런 조용함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아니면 해야만 하는 일은?
책상 위를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가 밥그릇에 저만치 밀려나 버린 디스크의 케이스를 다시 찾아든다. 그리고 그 속지에 인쇄된 노래들을 읽어본다. 참 오래된 노래야. 아마 10년 가까이 됐을걸. 그때는 이 노래를 신념이라고 믿었지. 그렇다면 지금은?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다시 스피커로 노래가 풀려나온다. 동그란 플라스틱 속에 갇혀있던 노래가 또한번 세상으로 나와 제 생명을 찾는다. 근 10년 전부터 지하로만 숨어다니며 살아가던 노래가 플라스틱 디스크 속에 갇혔던 94년 5월, 어쩌면 우리들도 그때 같이 차가운 플라스틱 속에 갇혀버렸던 것은 아닐까.
책상 밑으로 다시 다리를 뻗는다. 발목에서부터 무릎까지 피곤함이 신경을 타고 오른다. 하지만, 아직 잘 시간은 아냐. 해가 뜨려면 아직도 한참을 더 있어야 해. 그때까지는 깨어있어야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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