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달력을 들여다 본다. 거실에는 이미 그 때를 지나쳐버린 크리스마스 트리가 쉼없이 각양각색의 빛을 뿌려대고 있다. 트리가 뿌리를 묻고 있는 화분 옆에는 반짝거리는 금은색의 포장지에 싸인 선물꾸러미들이 멋대로 뒹굴고 있다. 나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본다.
딸아이의 것들, 아들아이의 것들, 그러나 그 속에 내 것은 없다. 그가 죽은 이후로 내게는 선물이란 것이 존재하질 않는다.
나는 가끔씩 환상같은 백일몽을 꾸곤 한다. 그 내용은 언제나 일정해서, 내가 그의 앞으로 다가가고 그가 웅크린 자세로 죽어가는 것으로 끝을 맺곤 한다.
그가 언젠가 내게 말했던 말이다.
"절망은 실상 본질을 드러내게 되면 그 생명력을 잃어버리지. 절망은 언제나 남 모르게 숨어있는 매복과도 같아. 때문에 얼만큼의 희생을 치루어야만 그것을 찾아내고 처치할 수 있지."
"하지만, 누가 그 희생물이 되길 원할까?"
나는 거리를 걷고 있다. 늦가을의 시들은 나뭇잎들이 포석 위로 가볍게 몸을 떨군다. 나는 잠시 서서 레인코트의 깃을 여미고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는다.
"네 머리칼은 마치 바람같애."
그는 죽었다.
믿고 싶지 않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나는 그날 그가 가족을 이끌고 갔던 그 모란공원의 눈덮인 정경을 기억하고 있다.
"내 가장 큰 소망은, 죽어서 여기에 묻히는 거야."
그러나 그의 죽은 육신은 불에 태워져 바람과 함께 흩날려졌다.
나는 가끔씩 공기 중에서 한숨을 쉬는 그의 영혼을 들을 수 있다. 그는 내게 말한다, 왜 그랬느냐고. 나는 고개를 떨군채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나는 가끔씩 그가 듣던 레코드들을 모아 듣곤 한다. 그가 듣던 음악들은 수많은 장르들을 묶어놓은 형태를 지니고 있다.
나는 바흐부터 너바나까지를 주욱 엮어 들으면서 그가 행했던 행위에 대해 나름대로는 진지하게 고민해보려고 노력해본다. 그러나 그 행위는 언제나 허사로 돌아간다.
그 때문에 나는 가끔 그의 죽음을 무척이나 단순하게 생각해보려고도 해본다. 그냥, 단순하게, 기분에 내켜서 죽었다는 식으로.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의 임종을 목격했다는 시올케의 말을 빌자면, 그는 마지막으로 입에 담지못할 욕설들을 뱉아냈다고 한다. 그 욕설들은, 대충 요약하자면, 언젠가 내가 그와 같이 보러갔던 영화에 기초를 둔 말이었다. 그는 그 영화를 보고 오는 길에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 영화의 배우가 아닌 게 너무나도 억울해. 마찬가지로 네가 그 영화의 여배우가 아닌 게 너무나도 억울해. 우리는 이 시대를 살고 있지만, 우리의 영혼은 아직도 과거에 머물고 있어. 빌어먹을!"
그날 밤에 그는 혼자 소주를 두 병이나 비웠고, 밤새도록 앓는 소리를 내었다. 나는 그의 얼굴에 내밴 땀방울을 차가운 수건으로 훔쳐내며 그의 아픔을 공유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 노력들은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그는 자기만이 알 수 있는 기호(記號)를 남겨놓고 자기만의 세계로 돌아가버렸다. 나는 그 뒤에 구겨진 채 앉아 하릴없이 쳐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그의 시체를 앞에 놓고 앉은 그날 새벽, 나는 소리를 질렀다. 영안실에는 나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맘편히 그의 시체에 내 불평들을 늘어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행위는 오래 가지 못했다. 내가 그의 머리맡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을 때 사람들이 들어왔고, 그들은 그의 육신을 끌고 어디론가 멀리 가버렸다.
그를 고향에 뿌리고 돌아온 날, 한때 그와의 단란했던 신혼방은 그와 나의 친구들과 선후배들로 가득 찼다. 그들은 내게 수없이 많은 위로의 말을 건냈지만, 그 어느 것도 나를 위로할 수는 없었다. 내가 학창시절 좋아했던 한 선배가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은, 결국 버티질 못했던 거야. 바보같이..."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더 이상 그는 예전의 낭만적이었던 선배가 아니었다.
어두운 방구석에서 막내동이에게 젖을 빨리고 있을 때 그 선배가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기겁을 했고, 그 선배는 입가에 알지못할 웃음을 흘렸다.
다들 술에 취해있었던 그날 밤은 유별나게 지리했고, 부연 해가 떠오르자 그들은 제각기 자기가 몰고 온 승용차에 올라타 내게 작별인사를 건냈다. 나는 제발이지 그들이 일분일초라도 빨리 떠나주길 바랬고, 그들은 그 바램에 부응하듯 무서운 속도로 아파트 단지를 떠나갔다.
그들이 떠나가고 난 아파트의 거실에 앉아, 잠이 든 막내와 잠투정을 부리는 첫째를 끌어안고, 나는 너무나도 일찍 떠나버린 그를 회상하며 울고 있었다.
거실에는 음악이 흐르고 있다. 그가 남겨놓은 마지막 음악. 안타깝게도 나는 그 음악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 때로 그는 지나치게 자의적이었다.
커피 포트의 물이 끓는 소리가 들린다. 피곤한 몸을 일으켜 본다. 두 스푼의 커피가루가 담긴 머그컵에 끓은 물을 부으면서 컵에 쓰인 문구를 읽어본다. 광고의 카피대로 해석해보자면 '나의 향기, 나의 선택'이란 말인데, 나는 어떠한 향기를 선택한 적도 없다. 나의 향기는 오직 하나, 세상에의 희망이었고, 나의 선택은 오직 그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의 그런 생각을 못마땅해했다. 너무 낭만적이라는 이유였다. 나는 당연히 토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옳았다. 나는 지금 그가 남겨놓은 음악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그는 옳았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었다는.
고개를 옆으로 꼬아 쳐다보면 애들이 정성껏 꾸며놓은 크리스마스 트리가 보인다. 아이들은 저희들이 하는 행위를 지나치게 중요시 여긴다. 그 옆에서 아이들의 행위를 부추키는 내 행위는 어쩌면 일종의 퇴행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아이들은 그와 나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이다. 나는 특히 그를 닮은 큰애를 보며 생전의 그를 상상해본다.
트리 꼭대기에 금빛 별을 세운 아이들이 내게로 달려와 매달린다. 나는 그 애들을 꼬옥 껴안아준다. 내 품에 안겨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굴리는 아이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나는 그의 마지막 말을 전해주려 노력한다. 그애들이 그 말의 뜻을 당장 알아듣지 못해도 상관없다. 언젠간 이 아이들도 알게 될 것이다.
씁쓸한 커피의 향내가 입안을 가득 채운다. 나는 머그컵을 들고 발코니로 나가본다.
새벽, 부연 안개가 창 밖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 자욱한 안개를 보며 커피를 마신다.
그는 이 발코니에서 죽었다.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알아차릴 수 없게.
희미하게 비치는 그림자 너머로 어둑한 산과 그 아래 무수한 불빛이 달려든다. 이 세계의 밤은 너무나도 밝고 환하다. 그것을 희망으로 볼 것인지, 절망으로 볼 것인지는 아직 내게 주어진 과제이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어본다. 그는 너무나도 커다란 고민을 내게 넘겨버리고 떠나갔다. 그가 새삼 미워진다.
"저기, 밤새가 날아가고 있네. 새는 밤에 날지 않는 법인데..."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곳에 검은 새의 실루엣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잠시 우리 둘은 그 멀어져가는 검은 그림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희망일까?"
그가 하늘에서 눈을 거두며 말했다. 그리고 내 눈을 쳐다보며 웃었다. 그와 첫 번째 입맞춤을 한 그날 밤을 나는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창 밖을 내다보며 가만히 미소를 지어본다.
밤은 더욱 이슥해지고 나는 싸늘한 공기를 막기 위해 거실바닥에 널부러진 쇼올을 집어 어깨에 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