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main image
praise orgasm!
- RSS 피드 변경 및 텍스트큐브...
- 방명록 정상작동, CCL 추가
- 이곳은?
전체 (314)
조그만 만화 (23)
짧은 그림, 또는 낙서 (55)
약간만 더 큰 그림 (20)
별* 없는 애니 (28)
뒤로 가는 게임 (11)
거미줄 위 플래시 (6)
이야기 소묘 (18)
영화 보고 떠들기 (35)
게임하다 떠들기 (9)
기억과 주절주절 (109)
- [뒷북] 나도 덩달아 해보는 2...
- 이보게 대통령
- 만화 [에덴] 완결
- 잠깐 개점폐업...
- 졸음중문답
- 아직 못봤는데.. 급땡기는군요!
- 일단 축하해도 무방할듯. 근...
- 오, 나 즐겁게 만화보고 있었...
- 이히히히 그러지뭐. 뭔가 행...
- 오늘 날씨가 좀 춥긴 했지만,...
- 대운하를 상식수준에서 비판하기
- 명박이의 막장 대운하..
- 노무현
- 판의 미로(2006) - 환상은 현...
- Ultima Online 삽입곡 중 명...
말미잘 규제 박영선 방송사나보험사나개잡놈들 멜론 더 위치 으흑! 하나TV 피터 잭슨 충전빳대리 삽질반대 독도맞고 씨발권력 만화콘티 이퀄라이저2000 별주부전 봉투질 두뇌게임? 꼬마야 BBK 300
꼬마야
별쥐의 포트폴료
믹시

구글 리더기에 추가
한RSS에 추가

[어둠 속에서] 이야기 소묘 - 2006년 09월 06일 00시 00분
2006년 09월 06일 00시 00분 2006년 09월 06일 00시 00분
94년의 여름은 정말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더웠다. 어느 정도였냐면 발바닥에 밟히는 아스팔트가 녹아서 군화 워커 밑창에 끈적하게 들러붙을 정도였다고 할까. 그 더운 여름에 매일같이 두꺼운 군복과 군화를 몸에 칭칭 두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저주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도 한가지 다행인 점은 내가 배속 받았던 '오일분석실'은 1년 365일 항상 일정한 습도와 온도를 유지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여름에는 에어컨을, 겨울에는 히터를 항상 모자람없이 틀어댈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오일분석실이란 데는 비행을 마치고 갓 내려온 비행기의 엔진 오일을 받아서 커다란 장비를 이용해 성분분석을 하고 그 분석결과를 가지고 엔진의 이상유무를 판단하는 곳이었다. 1억원이 훨씬 넘는 장비에 오일을 집어넣어 돌리는 것은 나를 비롯한 유상병과 최병장의 몫이었고 분석결과를 가지고 이상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오일분석실 반장인 김원사의 일이었다.

군대란 곳이 늘 그렇듯 편한 보직을 받은 졸병은 항상 고참들의 갈굼 대상이었다. 완전 무골호인인 최병장은 제대를 두 달 앞두고 있었고 다음 달이면 병장으로 진급할 유상병은 원래 활주로까지 나가 전투기에서 엔진을 떼었다 붙였다하는 고된 일을 하던 지원반에 있다가 손목을 삐어 오일분석실로 오게 된 경우라서 자대배치를 받자마자 편한 오일분석실로 배속된 나를 항상 못마땅했다. 그는 상병 5호봉이 되자 원래는 그의 몫인 오일분석실 청소와 뒷정리 등을 새까만 이등병인 나에게 몰아주었다.
아직 내무반 분위기도 다 파악 못한 졸병에게 작업장 일을 맡겨버린다고 몇몇 고참들이 못마땅해 했지만 나로서도 갑갑한 내무반 보다는 그편이 나았고 게다가 선임자가 별로 없어 기관중대에선 꽤나 고참인 무골호인 최병장이 선선히 승낙해버려 나는 얼렁뚱땅 이등병 말호봉 때부터 작업장을 전담하게 됐다. 덕분에 나는 아침 점호가 끝난 뒤에 늘상 있는 집합 대신 일찌감치 내무반을 나서 도중에 식당에 들러 아침밥을 먹고 서둘러 내려가 오일분석실을 청소하고 히터를 틀고 중대본부에 가서 비행시간을 적어오는 따위의 일만 하면 됐다.
물론 그런 식의 편안함은 곧바로 양날의 검이 되어 내게로 돌아왔다. 이병들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들인 일병이나 상병들은 툭하면 내게 시비를 걸었고 주말만 되면 내무반에 앉아있는 꼴을 못봐줘 수시로 나를 뺑뺑이 돌려댔다. 일병 계급장을 달고나서 한 달 가량이 되었을 때 나는 이제는 진급한 유병장에게 넌지시 아침에 내무반 청소를 해야되기 때문에 오일분석실 청소를 못하겠다고 말을 건 적이 있었다. 그때 유병장은 "그럼 병장인 내가 청소하리?"하며 내 머리를 사정없이 쥐어박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졸병 때부터 편한 보직을 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완전한 동네북이 되어버렸다.

계절이 바뀌고 끔찍하게 무더운 여름이 되었어도 고참들의 갈굼은 멈추질 않았다.
나는 여전히 아침마다 일찍 내려가 오일분석실 청소를 했고 혹시라도 야간비행이 있는 날이면 유병장 대신 분석실에 남아 있다가 내무반 청소와 점호가 끝나면 올라오곤 했다.
오일분석실의 일이라는 게 전투기가 떴다가 내리고서 길어야 한 시간 안쪽에 대략 3,4분 동안 처리하면 되는 것이라 나는 늘 유병장의 눈치를 보며 빈둥거릴 수 있었다. 제대하면 복학하기 전에 최소한 자격증 세 개는 따놓겠다는 유병장은 기계설계기사 기출문제집을 들여다 보며 내게 빈 시간 동안 공부나 해두라는 호의를 보이기도 했다.
오일분석실은 활주로 옆에 넓게 자리한 야전정비대대 가운데 기관정비중대 행거의 한쪽 구석에 있었다.
한여름이 되어도 에어컨의 힘으로 23도 가량을 유지하고 있는 오일분석실의 문을 열고 나서면 금방 기름냄새 섞인 뜨거운 공기가 폐로 밀려 들어왔다.
"활주로가 얼마나 뜨겁냐면 말야, 하사관들은 식당까지 밥먹으러 가기 귀찮으니깐 활주로에 계란후라이를 부쳐서 점심으로 먹는단 말야."
가득찬 폐오일을 커다란 드럼통에 버리고 있을 때 유병장은 마침 엔진을 끌고 들어오는 지원반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팬텀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F-4 전투기는 그 덩치만큼이나 엔진이 커서 1톤 트럭보더 더 커보이는 달리 위에 실은 엔진을 행거 안으로 끌고 들어올 때는 대여섯 명이 달라붙어서 밀어야 했다. 유병장은 일병 때 저 엔진을 실은 달리를 뒤에서 밀다가 미끄러져 넘어져 손목을 삐었다나.
"제공호 엔진은 혼자서도 끈다는데, 씨발."
유병장은 담배꽁초를 탁탁 털고 분석실로 들어갔다.

한여름의 공군기지는 야간출격이 잦았다. 보통 저녁 8시경까지 비행을 하고 내려오는데 그런 날이면 9시나 돼서야 내무반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오일은 활주로에서 비행을 마치고 내려온 전투기의 엔진에서 바로 뽑아서 바로 분석실로 오도록 돼있지만 거리가 멀고 왔다갔다할 인원과 차편이 바로 준비가 안돼있기 때문에 보통 한 시간 정도는 기다리곤 했다.
그런 경우와는 달리 한밤중에 비행을 하는 전투기가 있는데 모든 전투기는 반드시 착륙 후 오일검사를 하도록 돼있기 때문에 아무리 늦은 시간이래도 내무반으로 비행연락이 오면 잠을 자다가도 일어나 오일분석실까지 내려가야 했다.
그날도 그런 경우였다.
막 내무반 청소를 하려고 세면실에서 걸레를 빨고 있는데 내무반 방송으로 당직병의 목소리가 들렸다.
걸레를 쥐어짜고 당직사관실 앞으로 갔더니 마침 유병장이 터덜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당직병인 최병장이 말했다.
"야, 유병장! 야간 있다고 쏘프하러 내려오란다!"
웃통을 벗어제껴 깡마른 상체를 드러낸 유병장이 내쪽을 쳐다보더니 심드렁하게 말했다.
"야, 보고하고 갔다와라."
청소열외, 점호열외. 일병한테는 좋은 일이지만 병장한테는 옷 도로 차려입고 1킬로미터가 넘는 행거까지 갔다오기는 귀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일병에게는 고참들의 갈굼이 있었다.
"야 유병장. 니가 갔다오지? 일병이 뭘 아냐?"
"얘도 알 건 다 압니다. 뭐하냐? 가서 옷 갈아입지 않고."
나는 걸레를 든 채 병장들을 제외한 졸병들의 선임인 임상병에게 달려갔다. 임상병은 나를 지긋이 내려다봤다. 원래 찢어진 도끼눈이 더 심하게 찢어졌다.
"쌔끼, 또 열외가?"
나는 우물쭈물할 수밖에 없었다. 키가 무척 큰 임상병의 손이 내 뒤통수로 날아들었다.
"알았다, 씨팔!"
휘청거리는 나를 놔두고 임상병은 가버렸다.
옷을 갈아입고 중대 행정병에게 행거 열쇠를 받은 뒤 당직사관에게 작업보고를 하고 내무반을 나섰다. 한여름의 열대와는 상관없이 땀이 흘렀다.

터덜거리며 가로등도 없는 언덕길을 내려갔다. 사병식당을 지나고 BX를 지나 차길을 건너서 필드로 들어가는 게이트를 지나는데 게이트 앞에서 보초를 서는 헌병이 나를 지긋이 쳐다봤다. 게이트 앞의 초소에 켜둔 불빛이 게이트 근처에 몇 개 있는 가로등과 함께 주위를 괴괴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곳부터 행거까지는 활주로 주위에 켜둔 불 외에는 불빛이 하나도 없었다.
어둑한 속에 거대한 어둠으로 서있는 기체정비중대 행거를 지나 기관정비중대 행거에 도착했다. 주먹만한 자물통을 열고 행거 안으로 들어서니 완벽한 어둠이 나를 맞았다.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출입문 옆에 있을 전등 스위치를 찾았고 스위치를 올리자 커다란 소리와 함께 행거 꼭대기에 달린 전등의 한 줄에 불이 들어왔다. 그러자 가운데 통로를 기준으로 양 옆에 혹은 횡대로 혹은 종대로 늘어서 있는 거대한 엔진들이 보였고 통로 한쪽에는 내일 아침에 나갈 거라는 엔진 한 대가 달리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 엔진들 사이를 걸어 오일분석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몇시간 동안 갇혀있어 무더운 공기가 힘겹게 출렁였다. 나는 전등불을 켜고 에어컨을 켠 뒤 장비의 전원을 올렸다. 에어컨과 분석장비의 소음으로 공기가 진동했다. 부연 형광등 불빛을 받으며 나는 의자에 앉아 일과중에는 늘상 켜두는 라디오를 켰다. 그러고나서 생각해보니 언제 비행 들어가서 언제 착륙하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보통 비행은 한 시간을 넘기지 않으니 늦어도 두 시간 안에는 오일이 들어오겠지. 시계를 올려다봤다. 10시가 막 되려고 하고 있었다. 지금쯤 점호를 하고 있을테고, 자정까지는 끝내고 올라가서 잘 수 있겠지.
나는 맘 편히 있기로 했다. 군화를 벗고 슬리퍼로 갈아신은 뒤 상의를 벗고 에어컨 앞에서 땀을 식혔다. 라디오에서는 디제이와 게스트가 낄낄거리며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몸이 어느 정도 식자 나는 의자에 앉아 내무반 한쪽에 마련된 책장에서 집어다 놓은 무협지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이따금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무협지를 읽다가 문득문득 시계를 보면 더디게 흐르는 시간이 고만큼씩 뛰어넘어가 있었다. 지루한 무협지를 덮고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11시가 되려면 아직 10분 가량 남아있었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잠깐 서성거리다가 김원사의 책상 위에 놓인 재떨이를 봤다. 원래 오일분석실에서는 흡연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중대 내에서 가장 시원한 이곳엔 점심식사를 마친 상사니 원사니 준위들이 모여서 잡담을 하며 담배를 피워댔기 때문에 항상 재떨이가 마련돼 있었다. 나는 벗어서 의자 등받이에 걸쳐놓은 상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고 창문을 살짝 열었다. 후끈한 한여름밤의 대기가 울컥하며 밀려들었지만 곧 차가운 실내 공기와 섞여버렸다. 창문 옆에 서서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난 나는 한 번 더 실내를 서성거리다가 의자에 앉아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모든 전투기의 정비 일정은 정비타워라고 불리는 곳에서 주관하고 있었고 당연히 전투기의 이착륙 여부도 정비타워에서는 모두 알고 있었다. 나는 이전에 야근을 하다가 유병장이 정비타워에 전화를 걸어 전투기의 착륙여부를 묻는 걸 본 적이 있었다.
"타워 이중삽니다, 통신보안."
"아, 필승! 소프실 이일병입니다, 통신보안. 저기 오늘 야간비행 내려왔습니까?"
"쏘프실? 아니 오늘 야간 없는데?"
어라, 이건 뭔가 아니다 싶은 생각이 스쳤다.
"어... 오늘 야간 없습니까? 내무반에서 연락받고 내려왔는데요...."
"아니, 오늘 야간 없다."
느긋한 경상도 사투리.
"알았습니다, 필승."
수화기를 내려놨다. 어떻게 된 거지? 당직병인 최병장은 오늘 야간비행이 있다고 내려가서 작업하고 오라고 했고 당직사관 역시 아무 말 없이 보내주었다. 그런데 정비타워에서는 오늘 야간비행이 없다고 한다.

에어컨이 실내 온도를 23도로 맞춰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땀이 흘렀다.
일단 내무반으로 전화를 걸어서 확인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화기에 손을 올려놓자 갑자기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렸다. 나는 화들짝 놀랐지만 급하기 마음을 가다듬었다. 혹시 정비타워에서 잘못 알았다고 전화한 건 아닐까? 그래서 지금 오일을 보낸다고 하는 건 아닐까? 수화기를 들었다.
"야 이 새끼야, 뭐해! 빨리 튀어 나와!"
그리고 엄청나게 큰 잡음.
나는 수화기를 내던지고 의자를 넘어트리며 한쪽 벽까지 후다닥 물러났다. 책상 위에서 늘어져 대롱대롱 매달린 수화기에선 계속 시끄러운 잡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등쪽에서 서늘한 한기가 흘렀다.
"아, 씨팔, 뭐야!"
한 마디라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으면 못견딜 거 같았다. 나는 더듬거리며 책상 쪽으로 다가가 우선 수화기를 들어 재빨리 전화기 위에 던지듯 올려놓고 의자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주위를, 형광등 불빛이 밝히고 있는 8평 남짓한 실내를 둘러봤다. 둘러보던 내 눈이 창문에 걸렸다. 아까 담배를 피우고 안 닫아놨던가? 10센티미터 가량 빼곡이 열린 창문 밖으로 완벽한 어둠이 내다보였다. 거기에 뭔가가 있었다. 아니,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몸을 날릴 듯이 움직여 창문을 닫았고 걸쇠를 걸었다. 이제는 공포가 주위를 서서히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황급히 에어컨을 끄고 장비의 전원을 내리고 대충 군화를 꿰어신은 다음 상의를 들고 문쪽으로 다가갔다.
"분명히 타워에선 야간 없다고 했다고. 난 갈 거야."
일부러 쥐어짜듯 목소리를 냈지만 그 목소리는 상당히 낯설었다.
나는 불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 에어컨 바람으로 식어있던 몸에 뜨거운 공기가 끈적하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오일분석실의 문을 잠그고 부연 불빛을 받고 있는 행거 안을 서둘러 걸었다. 줄줄이 늘어서 있는 엔진들은 전등빛을 받지 않는 곳에 시커먼 그림자를 만들어놓고 있었다. 나는 그 그림자 속에서 뭔가가 튀어나오는 상상을 억지로 억누르며 뛰듯이 걸었고 스위치 있는 곳에 도착했다.
스위치를 내리면 이제 행거 안은 완벽한 어둠에 휩싸일 터였다. 나는 열어놓은 출입문 쪽을 봤고 불을 끄자마자 뛰어가도 되도록 출입문까지의 경로 안에 장애물들이 없음을 확인했다.
스위치를 내렸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눈 앞이 아찔해졌다. 내 손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나는 달렸다. 군화 밑창이 페인트를 발라놓은 시멘트 바닥 위를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 소리는 한둘이 아니었다. 갑자기 수많은 군화발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고, 뭔가에 걸려 넘어졌다. 머리속에서 뭔가 하얀 것이 터졌다. 한바퀴 나뒹군 나는 벌떡 일어섰지만 출입문으로 향하는 방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주위는 여전한 어둠이었고 군화발 소리는 계속 울려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더욱 시커먼 뭔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게 뭔지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머리속이 점점 새까맣게 물들어 갔다. 미칠 것만 같은 기분으로 시커먼 존재들을 무시하려 애를 쓰며 주위를 둘러보던 내 눈에 희미하게 출입문의 윤곽이 들어왔다. 생각하기도 전에 내 몸은 소리를 지르며 그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군화발 소리와 시커먼 것들이 내 몸을 뒤에서 옆에서 잡아채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달렸다. 그리고 문턱에 발목이 걸리며 나는 행거 밖으로 나뒹굴었다.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벌떡 일어나 출입문을 닫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자물통에 열쇠를 꽂아 열고 걸쇠에 걸고 다시 채웠다. 그리고 주춤주춤 뒷걸음질로 출입문에서 물러났다.
사방은 고요했다. 너무 고요해서 근처 풀숲에서 들리던 벌레들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한쪽 군화가 벗겨져있는 걸 알아차렸다.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도 군화는 행거에서 저만치 떨어진 곳에 아무렇게나 떨어져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그제야 오른쪽 발목이 지독하게 아픈 것을 알았다.
공포는 한결 가라앉았지만 그래도 돌아오는 길의 어둠은 여전히 무서웠다. 하지만 아픈 발목 때문에 빨리 걷지를 못했다. 절룩거리며 겨우 게이트 근처의 밝은 빛 속으로 들어오자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게이트의 초소를 지키는 헌벙은 안 보였다. 초소 옆을 지나는데 초소 안에서 전화통화를 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즐거워하고 있었다. 나직하게 씨팔을 되뇌었다.
절룩거리며 내무반으로 들어서니 창으로 내쪽을 빼곡이 내다보던 당직병 최병장이 놀라며 소리질렀다.
"야! 너 어떻게 된거야?"
그는 후다닥 뛰쳐나와 나를 당직사관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반쯤 간이침대에 누워 당직하사와 농담을 하던 당직사관 역시 하얗게 질린 얼굴이 되어 나를 쳐다봤다. 난 당직사관실 벽에 걸린 거울로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얼굴을 여기저기 피가 묻어 있었고 상의는 앞 단추를 채우지 않은 채 군데군데 찢겨져 있었다.
나는 세 사람 앞에서 더듬더듬 오일분석실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당직사관이 최병장을 노려봤다.
"야, 진짜 쏘프 있다고 했어?"
"타워 이중사라고 연락 왔었다니깐요?"
최병장은 억울한 얼굴이 됐고 당직사관은 직접 정비타워에 전화를 걸었다.
"야, 이일병. 일단 씻고 와라."
전화를 끊은 당직사관은 나에게 말했고 나는 절룩거리며 세면실로 들어갔다.

그날 나는 당직사관의 차를 타고 의무대로 달려가 당직을 서던 의무병에게 치료를 받았다. 발목은 심하게 부었지만 뼈가 다치진 않았다고 했고 얼굴은 왼쪽 턱 근처에 다섯 바늘 정도를 꿰매야 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당직사관은 물었다.
"야, 니가 아까 한 말 사실이야?"
"사실입니다."
잠깐 침묵하던 당직사관은 다시 말했다.
"나 여기 14년 동안 있으면서 귀신소동 같은 건 한 번도 없었거든? 니가 너무 무서워서 헛것을 보고 들은 거야."
"그럼 쏘프 있다고 한 것도 헛것입니까?"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말았다.
"아무튼 니가 잘못해서 넘어져서 다친 거니깐 너무 상심하지 말고, 들어가서 푹 자라. 담부턴 조심하고."
"네... 알았습니다...."
다음날 나는 유병장을 비롯한 고참들에게 어제의 일을 시시콜콜이 얘기해야 했고 행거에 내려와서는 중대장의 호출을 받아 중대장과 중대감독관, 주임원사에게 또 같은 얘기를 반복해야 했다. 중대장과 주임원사는 낄낄거리며 내 머리를 두들겼고 감독관은 또라이 어쩌고하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94년의 여름은 지나갔다. 그 뒤로 야간비행이 몇 번 있었지만 모두 중대 전체가 야근하던 중이었고 제대할 때까지 한 번도 혼자 밤에 행거로 내려갈 일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그때의 일에 대한 기억은 나로 하여금 의도적으로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은 이제 헛수고가 돼버렸다.
지금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이 어둠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야기 소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글의 관련글

0
2
이 글의 관련글(트랙백) 주소 :: http://level-b.org/blog/trackback/114
이내 2006년 11월 02일 01시 26분
잘 읽었습니다.
94년 유난히 더웠었죠.
저도 군복을 입고 열심히 뒹굴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별쥐 2006년 11월 03일 18시 44분 
끔찍한 시절에 끔찍한 경험을 하셨군요.^^;;
비밀글로 등록
[1] ... [209][210][211][212][213][214][215][216][217] ... [314]
LEVEL-b는 기본적으로 카피레프트를 표방합니다. 카피라이트는 엿이나 먹으라 하십시오. 하지만 상업적인 무단도용에 대해서는 당연히 지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