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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벨 리:검은 바다의 전설 또는 포우 주제에 의한 판타지] 이야기 소묘 - 2006년 03월 10일 05시 55분
2006년 03월 10일 05시 55분 2006년 03월 10일 05시 55분
마차 지붕에서 커다란 가방을 내려주며 마부가 말했다.
"저기 보이는 길로 한 10분만 걸어올라가면 나올 거요."
나는 마부가 가리키는 쪽을 보았다. 우거진 침엽수림 사이로 작은 사잇길이 나 있었다.
"수고했소."
"그럼, 열흘 뒤에 다시 오겠소."
마차가 떠나가자 나는 가방을 들고 침엽수림으로 다가갔다.

길은 좁았다. 북국의 삼림이 다 그렇듯 나무들은 수백년 동안의 폭풍을 받으며 자라느라 억센 줄기를 드러내고 있었지만 그것이 위압을 주지는 않았다. 나는 몇번이나 가방을 땅에 내려놓고 쉬면서 길을 올라갔다. 녹색으로 빛나는 부드러운 이끼가 깔린 길이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며 높아지고 그 길 끝에 공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숲을 나와서 가방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며 주위를 둘러봤다. 방금 내가 빠져나온 침엽수림이 공터를 감싸며 넓게 펼쳐져 있었고 공터의 가운데에는 낡은 3층짜리 목조 건물이 앞에 펼쳐진 북국의 바다를 내려다보며 서있었다. 나는 다시 가방을 들고 건물로 다가갔다.

건물 현관에는 낡고 비바람에 닳아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나무간판이 달려있었다.
나는 잠시 서서 그 간판을 쳐다보았지만 글자는 도통 알아볼 수 없었다. 현관을 열고 들어가자 갑자기 눈으로 어둠이 닥쳐왔다.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눈이 어둠에 익기를 기다렸다.

"아무도 없소?"
실내는 꽤 낡았지만 나름대로 정리가 되어있었다. 바닥은 빛이 상당히 바랜 푸른색 빌로오드를 깔아놨고 어둠에 눈이 익어가면서 맞은 벽에 붙은 프런트와 그 옆쪽으로 계단, 벽난로, 의자와 탁자 등이 보였다. 그리고 프런트 옆 구석의 흔들의자에 앉아 파이프를 피우고 있는 노인도.
"안녕하십니까. 노인장. 연락을 받으셨을테죠?"
노인이 흔들의자에서 일어나 구석의 그늘을 벗어나자 나는 그가 적어도 80 이상 나이를 먹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노인은 목구멍에 가래가 그렁그렁 거리는 소리로 인사를 하며 다가와 오른손을 내밀었다.
"연락은 받았소.... 미국양반...."
악수를 하자 그는 바로 뒤돌아서더니 계단 쪽으로 느릿느릿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방을 안내해주나보다 싶어 가방을 들고 그의 뒤를 따랐다. 삐거덕거리는 목조계단을 천천히 앞서 오르며 그가 말을 건넸다.
"뉴욕에서부터 배타고 오는 길이오?"
"예, 약 한 달 전에 떠났었죠."
"그럼 그동안 어디 있었소?"
"스톡홀롬에서 며칠 있다가 그저 여기저기 해안선만 따라 여행 중입니다."
"이리로 오면서 바다는 봤겠구만."
"아뇨... 워낙에 피곤해서..."
노인은 더이상 말을 안하고 한 방문 앞에서 멈췄다.그리고 나에게 열쇠를 건네줬다.
"좀 낡았지만 지내는 덴 별 무리 없을 거요. 뭐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마리를 찾으시구려."
노인은 다시 느릿느릿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계단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던 나는 열쇠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외딴 여인숙답지 않게 방은 깨끗했다.
나는 가방을 한 구석에 내려놓고 침대 옆에 있는 창으로 다가가 커텐을 제키고 유리창과 덧창을 열었다. 아주 잠깐 쏟아져들어오는 햇살에 얼굴을 찡그렸지만 금방 익숙해졌다. 그리고 나는 밖에 펼쳐져있는 풍경을 보고 놀라고 말았다.
공터에서 봤을 때는 반사광 때문에 몰랐는데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검붉은 색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나는 찬찬히 바다를 구경했다. 여인숙이 자리한 공터는 해안에서도 좀 높은 지대였고 공터와 바다가 맞닿는 해안선은 벼랑이었다. 그 벼랑이 침엽수림을 싣고 남북으로 완만하게 낮아지며 바다쪽으로 곡선을 그리다간 집게 모양의 곶을 형성하고 있었다. 곶 바깥쪽의 바다 색이 어떤 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집게발 모양의 곶의 안쪽, 그러니까 만(灣)을 이루는 바다는 흡사 피를 가져다 부어놓은 듯 검붉은 빛을 띄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참 희안한 바다도 다 있구나 싶었지만 워낙에 피곤했던 터라 더이상 생각하기를 그만 두고 코트만 벗어던진 뒤 금방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한밤중인듯 사방이 컴컴했다. 나는 손을 더듬어 성냥을 그어 머리맡 램프에 불을 붙이고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아까 바다를 내다보고 창문을 그대로 열어뒀는지 서늘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으스스 떨리는 어깨를 양 손으로 껴안으며 창문을 닫았다. 커텐까지 치고 나서 시계를 꺼내봤다. 9시 45분. 피로가 어느 정도 가시자 이번에는 허기가 밀려왔다. 나는 램프를 들고 방문을 나서 삐거덕 거리는 나무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1층에는 아무도 없는듯 현관문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소리만이 들려왔다. 나는 노인이 아까 가르쳐준 이름을 불렀다.
"마리?"

이름을 세번은 더 부르고도 한참 있자 프런트 옆, 흔들의자가 있는 옆에 나무문이 열리더니 살집 좋은 중년 여인이 나왔다.
"예, 손님."
"저기, 지금 몹시 시장한데 식사 좀 할 수 있을까요?"
"그러죠."
여인은 큰 몸을 흔들며 다시 문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거기 탁자에 앉아서 좀 기다리세요."

여인이 문 안으로 사라지자 나는 아무 탁자에나 가서 램프를 올려놓고 앉았다. 탁자보도 바닥에 깔아놓은 빌로오드만큼이나 빛이 바래 있었다. 1층에도 역시 창이 있었는데 모두 닫혀있었고 두터운 커튼이 쳐져있었다. 실내를 주욱 둘러보던 나는 프런트를 지나다가 깜짝 놀랐다. 거기 흔들의자에 아깐 없던 노인이 앉아 파이프를 물고 있었다. 가래가 걸린 탁한 목소리로 노인이 껄껄 웃었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하오, 미국 양반. 이름이...?"
노인이 의자에서 일어나 탁자쪽으로 다가왔다.
"포우입니다."
"흠... 그렇소?"
노인은 파이프를 왼손에 잡고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램프 불빛을 건너 보는 노인의 모습은 이상하게 흐릿했다.

"위층에 올라가서 바다 좀 내다봤소? 포우씨?"
"예 봤습니다만..."
"좀 뭔가 이상하지 않소?"
"예... 색깔이 좀 이상하더군요."
"듣자하니 시인이라던데,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
그때 문이 열리고 마리라는 아까의 여인이 쟁반을 하나 들고 나타났다.
"아이구, 저 노인네 또 저러고 있네 그려."
여인이 내 앞에 쟁반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신경쓰지 마시우, 손님. 저 양반은 그저 아무나 보면 얘기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니까."
나는 쟁반 위를 보았다. 스튜, 구운 빵, 우유, 절인 생선구이가 접시에 담겨 있었다.
"자, 여행하느라 시장할텐데 어서 드시우."

스푼으로 스튜를 떠먹는데 노인이 또 말을 꺼냈다.
"듣고 싶지 않소? 분명 좋은 소재가 될텐데..."
"손님 신경쓰지 않고 식사하게 좀 가만 있어요!"
여인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아, 아닙니다. 식사하면서 들어도 되니까 말씀하십시오. 흥미가 생기는군요."
나는 일부러 웃으며 둘에게 말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내가 싸움의 발단이 되는 건 그리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 그렇지. 역시 글을 쓰는 양반이라 뭔가 아는 모양이구만."
노인이 기뻐했고, 여인은 노인을 쳐다보며 잠깐 혀를 차더니 몸을 돌려 문으로 사라졌다. 나는 스튜를 다 떠먹고 생선구이를 한 조각 입에 넣었다.
"음... 이건 맛있군요."
"이 앞에서 나는 생선이라오. 옛날에는 이 생선만 갖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었지. 더 먼 옛날에 이 근처는 이렇지 않았다오. 벼랑도 없었고, 바로 앞바다가 만을 이루었기 때문에 파도도 낮아서 훌륭한 항구도시가 될 수 있었지. 바닷물도 참 푸르렀다지."
"근데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음... 그래. 무슨 일이 있었지. 그 일이 있고 난 뒤 이렇게 벼랑이 생겼고, 바닷물이 붉은 색을 띄게 되었다오. 물론 이 자리에 있던 도시 하나가 말끔하게 사라져버렸고..."
노인은 파이프를 왼손에 쥐고 가래가 걸리는 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젊은 어부가 있었지요. 이름도 없고 가족도 없고, 어릴 때부터 그저 바닷가를 떠돌아다니며 다른 어부들이 흘린 찌꺼기를 주워먹고 자라다가 자기도 어부가 되어버린, 아주 비천하고 가난한 그런 어부였소.
이 바닷가 왕국이 아직은 강성할 때 곶으로 둘러싸인 항구에는 커다란 배들이 끊이지 않고 들락거렸고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기쁜 노래들을 불렀다오.
항구의 시장은 번창했고 귀족들은 화사하게 꾸민 배를 타고 항구 근처에서 뱃놀이를 즐기기도 했소. 부족함이 없었고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도 없었으며 불행한 사람도 없었지요.
젊은 어부도 물고기를 잡아다가 혼자서 부족함 없는 삶을 살고 있었소. 어릴 때부터 혼자 커온 젊은 어부는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들을 모두 자기의 손으로 끊을 수 있을 정도로 패기만만했죠. 어부는 자기가 비천하다는 것도 가난하다는 것도 알지 못했소.
하루하루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으고 그 돈으로 편안하고 풍족한 생활을 꿈꾸었소. 그는 자기가 맘만 먹으면 귀족도 될 수 있다고 믿었다오.

어느 명절날이었소. 어부는 자기 집 앞에서 그물을 손보고 있었지. 그런데 멀리 바다쪽에서 음악소리가 들리는 거요. 무슨 일인가 해서 눈을 찡그리고 보니 아름답게 꾸민 배가 떠있는 것 아니겠소. 귀족들이 뱃놀이를 나온 거였소. 어부는 그 아름다운 배를 계속 바라봤죠. 아니 그 배에 탄 귀족들의 즐거움을 바라본 게 맞을 거요. 그러다가 어부는 뭔가 이상한 것을 봤소. 배가 계속 저 길로 가다가는 옅은 조류에 말려든다는 거였지요.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는 어부들은 조류에 밀려들어도 되는 시기와 안되는 시기를 잘 알지만 귀족들이 어디 그런 것을 알겠소? 저렇게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말려들다가는 그들이 알아차릴 땐 이미 먼 바다로 밀려난 뒤일테고 그러면 저런 작은 배 정도는 금방 가라앉을 것이었소. 어부는 그들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일어나 두 팔을 휘저으며 소리쳤소. 그쪽으로 가면 안돼요, 그쪽으로 가면 안돼요, 하고 말요. 그런데 귀족들이 그런 어부의 소리를 들었다고 해도 어디 비천하고 가난한 어부의 말을 들으려 하겠소? 어부는 안되겠다 싶어 자기의 배를 끌어냈소. 그리고 노를 저어 귀족들의 배로 다가갔지요. 어부의 배가 가까이 갔을 때 이미 귀족들의 배는 조류에 휘말려들고 있었소. 귀족들의 배 위에서 동요가 일어났소. 어부는 이대로 가다간 자기도 조류에 말려들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하지만 사람들이 죽는 걸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었지요. 어부는 귀족들의 배에 최대한 다가가서 소리쳤지요. 힘껏 노를 저어 조류에서 빠져 나오라고. 그러는 어부의 눈에 그녀가 들어온 거요.
화려하고 풍족한 이 바닷가 왕국에서 아마도 가장 아름다운 그녀는 도와달라는 듯한 애타는 눈으로 어부를 바라보고 있었지요. 어부는 그녀를 보는 순간 넋을 잃고 말았소. 귀족들의 아가씨는 많이 봐왔지만 저렇게 아름다운 아가씨는 처음이었던 거요. 어부는 망설여선 안된다고 생각했지요. 어부는 물속으로 뛰어들었소. 그리고 필사적으로 헤엄쳐 귀족들의 배에 다가갔소. 귀족들의 배에 오른 어부는 경험있는 선장처럼 배의 방향을 바꾸었소. 그리고 노젓는 귀족들의 노예들을 격려해 힘껏 그 조류에서 빠져나오도록 했소. 귀족들의 배는 무사히 바닷가에 닿았지요. 귀족들은 모두 자기들을 구해준 어부에게 치하했소. 그러나 어부는 그런 귀족들의 치하에는 관심이 없었소. 어부는 오직 한 사람을 구하려고 했던 거요. 바로 그녀. 이 바닷가 왕국 재상의 딸인 아름다운 애나벨 리를 위해서 말이오.
비극은 그때 시작되었소. 어부는 아름다운 애나벨 리와 자기가 맺어질 수 없는 운명이란 걸 알고 있었소. 그러나 어부는 그러한 운명 정도야 자기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지요. 그래서 그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된 거요. 아름다운 애나벨 리는 매일 저녁 몰래 자기의 화려한 궁전 같은 집을 빠져나와 어부를 찾아왔고 그 둘은 달빛과 별빛이 떨어지는 바닷가 모래사장에 앉아 사랑을 나누었죠. 그들은 사랑 이상의 사랑으로 사랑했소. 하늘의 날개 달린 천사들도 그들을 부러워했던 사랑으로 말이오.

그 둘의 사랑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소. 그녀의 아버지인 재상은 자기의 지체높은 딸이 비천하고 가난한 어부와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을 거요. 애나벨 리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화려한 집을 빠져나와 어부의 집으로 향했소. 둘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이 없는 바다 건너 먼 나라로 가려는 거였소. 아름다운 애나벨 리와 어부는 환하게 내리는 달빛과 별빛을 받으며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약속했소. 어디를 가든, 어떤 일이 닥치든 서로 굳게 사랑하고 헤어지기 말자고. 애나벨 리의 눈동자는 별빛을 담아 아름답게 반짝였소.

둘은 배를 끌어내어 바다로 나갔지요. 그들이 탄 배가 만을 채 빠져나가기도 전에 육지에서 수많은 횃불이 몰려오는 것을 발견했소. 재상인 애나벨 리의 아버지가 그 둘을 찾기 위해 사람을 보낸 거였소. 어부는 열심히 노를 저었지만, 둘을 쫓는 자들의 배는 너무나도 빨랐고 너무나도 컸소. 그들은 어부와 애나벨 리가 탄 배에 접근하여 갈고리를 던졌고 배를 끌어왔소. 어부와 애나벨 리는 큰 배 위로 옮겨졌지요. 아름다운 애나벨 리는 어부를 부르며 화려한 선실로 끌려들어갔고 건장한 선원들에게 붙잡힌 어부는 자기를 무섭게 노려보는 재상의 시선도 의식하지 못한채 애나벨 리만 불렀소. 노여움에 찬 재상이 어부에게 뭐하고 말을 했지만 이미 어부는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소. 자기의 아름다운 애나벨 리를, 오직 나만을 사랑하고 나에게 사랑받는 것만을 생각하던 아름다운 애나벨 리를, 비천하고 가난한 어부라는 이유만으로 자기에게서 빼앗아 가다니... 저렇게 나를 찾고 있는데... 어부의 몸에 몽둥이의 세례가 쏟아질 때도 어부는 그 아픔을 알지 못했소. 어부는 배 위에서 그렇게 얻어맞고 기절을 했죠.
선원들은 기절한 그를 그의 배에 다시 태워 마음대로 가도록 바다 위에 내버렸소.
그리고 그들은 애나벨 리를 데리고 가버렸다오.

달빛과 별빛이 아직 출렁이는 물 위로 떨어질 때 어부는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렸소.
그리곤 뭇매를 맞아 생긴 아픔보다도 사랑하는 애나벨 리를 빼앗겼다는 아픔 때문에 배 위에서 혼자 울었소. 혼자 서럽게 울다가 그는 자기에게 살아갈 수 있는 일자리와 식량을 주는 바다에게 호소했소. 그녀를, 사랑하는 애나벨 리를 다시 내게로 데려와달라고. 그리고 그녀를 데려간 자들에게 저주를 내려달라고. 어부는 사랑하는 애나벨 리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이 아름다운 바닷가 왕국이 모두 물에 잠겨도 좋다고 자기의 부모인 바다에게 기원했소.
그렇게 어부가 울면서 애나벨 리를 데려간 귀족들과 왕국을 저주하고 있을 때 동녘이 환하게 떠오기 시작했고, 어부는 저 멀리 수평선에 뭔가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소.
그것은 무섭게 빠른 속도로 다가왔고, 어부는 금방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소. 바다는 어부의 기도를 받아들인 거였소.

무시무시한 해일은 어부를 데리고 바닷가 왕국을 쳐들어갔소. 항구의 커다란 배들은 부서졌고 번화한 시장 거리는 혼란에 빠졌으며 아름다운 건물들은 무너졌소. 바닷가 왕국의 모든 것은 물 속으로 잠겨들었소. 높은 왕궁도 지체높고 귀한 귀족들도 모두 물 속으로 잠겨들었소.
어부는 물 속으로 뛰어들었소. 그리고 무너진 애나벨 리의 집으로 들어갔소. 아아, 그러나, 이미 아름다운 애나벨 리는 물 속에서 숨이 끊어진 채 떠있었소.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채는 풀어진 채 물결을 따라 흩날리고 있었고, 그녀의 맑게 빛나던 눈은 굳게 감긴 채 열리질 않았소. 어부는 그녀의 입에 입을 맞췄소. 그러나 이미 그녀는 숨을 쉬지 않았소. 어부는 그녀를 데리고 물 위로 올라갔지요. 그리고 사랑하는 애나벨 리의 생명을 앗아간 모든 것들을 다시 저주했소. 자기의 소원을 받아들여 바닷가 왕국을 물에 잠기게 한 바다까지도 저주했던 거요.

서쪽 하늘에 황혼이 지자 왕국을 덮고 있던 물이 빠지고 예전에 화려했던 왕국의 폐허가 모습을 드러냈소. 살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소. 오직 어부의 의식만이 싸늘하게 식어있는 애나벨 리를 되살리고 있을 뿐이었소. 어부의 의식 속에서 애나벨 리는 아직 죽지 않았던 거요. 그 안에서 어부와 애나벨 리는 지체높은 그녀의 가족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달빛과 별빛이 떨어지는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었소.
하늘의 날개달린 천사들도 시샘할 만큼, 그렇게 사랑 이상의 사랑으로 말이오. 그렇기 때문에 컴컴해진 하늘, 그 어두운 구름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와 애나벨 리를 데려가고 말았소. 어부는 정신을 차렸지. 그의, 그의 사랑하는 애나벨 리가 그녀의 검은 귀족들에게 끌려가고 있었소. 바닷가 왕국의 망령은 그렇게 그 둘의 사랑을 가만 놔두지 않았던 거요.
어부는 절규했소.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었던 바다에게, 그러나 자기의 사랑하는 애나벨 리의 생명을 앗아간 바다에게, 그리고 마지막까지 애나벨 리의 영혼을 가두려는 바닷가 왕국의 망령에게, 어부는 격렬하게 저주를 했소. 어부는 왕국의 그림자로 사라져 가는 그의 연인을 쫓으려했지만 왕국의 망령은 그의 발을 붙잡고 놔주질 않았소.

그러자 다음 순간, 땅이 흔들리기 시작한 거요. 바다 밑의 악마가 요동을 치듯, 하늘의 천사들이 진노한 듯, 땅이 흔들리고 어부는 왕국의 망령으로부터 자유로와져 애나벨 리를 데리고 간 그녀의 친척들을 쫓았소.
화려하고 부유했던 바닷가 왕국은 그렇게 몰락했소. 왕국이 있던 땅은 솟아올랐고, 왕국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명과 피는 한 어부의 저주로 인해 만을 검붉게 물들인 거요.
어부는 끝내 검은 귀족들에게 끌려가는 애나벨 리를 발견했지요. 결국 왕국의 망령도 그들의 사랑을 막을 순 없었던 거요. 검은 귀족들은 땅의 질서가 무너지면서 소멸해버렸고 어부는 사랑하는 애나벨 리를 되찾을 수 있었소.
달과 별이 떠올라 그 아름다운 빛을 바다의 물결 위로 흩뿌려댈 때 어부는 애나벨 리의 옆에 누워 있었소. 영원 속으로 빠져버린 그 밤이 새도록 말이오.

새벽의 바닷바람은 몹시도 차가웠다. 내가 코트의 깃을 여미자 노인은 가래가 끓는 소리로 웃었다.
"이 근처의 바다는 성질이 아주 못되기로 유명하지요. 실력있는 항해사들도 되도록이면 이 근처로 항로를 잡질 않소. 또 이 부근에 어촌이 없는 것도 그런 이유요. 누구든 바다 속에 말려들어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노인께서는 여기서 얼마나 사셨습니까?"
"나? 음... 참으로 오래 살았지. 참으로 오래 말이야."
등 뒤로부터 어둠이 밀려나고 있었다. 만으로 난 벼랑이 검붉은 바다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채.
"이젠 여기를 찾는 사람들도 별로 없다오. 나도 이제 살 날이 얼마 안남았고, 내가 죽고 나면 여기는 완전한 폐허가 되겠지..."
"마리는요?"
"자기 고향으로 가겠지. 그 여자도 여기를 못떠나서 안달이라오."
나는 파이프를 물고 연기를 품어내는 노인을 바라봤다. 이 노인은 도대체 여기서 얼마나 오래 산 것일까? 왜 이 외딴 곳에서 저런 허름한 여인숙이나 하면서 사는 것일까?
"이만 들어가지, 젊은 양반. 바람이 꽤 차구만."
노인은 말을 꺼내고는 앞서서 느린 걸음으로 여인숙을 향해 걸었다. 나는 한번 더 고요하게 있는 검붉은 바다를 보고 노인의 뒤를 따랐다.

그날 밤 폭풍우가 불었다. 나는 2층 내방에서 램프를 켜놓고 써놓은 시들을 다시 읽고 있었다. 사나운 북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낡은 3층 목조건물을 사정없이 후려치는듯 건물 전체가 삐거덕거렸다.
나는 바람소리와 삐거덕거리는 소리 때문에 집중이 되지 않아 읽던 시들을 덮어놓고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을 걷고 조심스럽게 창을 열었다. 덜컹거리며 들창이 요동을 쳤고 틈 사이로 빗물이 흘러들고 있었다. 들창을 열자 사나운 비바람이 들이쳐 나는 황급히 들창을 다시 닫을 수 밖에 없었다. 그새 흠뻑 젖어버린 옷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다시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고 하자 마리가 희미한 램프를 들고 들어섰다.
"무슨 일입니까?"
어둑한 속에서 램프의 불빛을 받은 마리의 둥근 얼굴은 어둠 속에 덩그라니 떠있는듯 했다. 건물은 여전히 바람으로 힘겨운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혹 영감이 여기 오지 않았수?"
마리의 얼굴은 근심으로 가득했다.
"아니오, 오지 않았습니다만..."
마리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집안에 없습니까?"
고개가 끄덕였다.
"언제나 비바람이 부는 밤에면 꼭 없어지곤 한답니다. 노인네가 망령이 들어서..."
"어디 짚이는 곳이라도 없습니까?"
"아뇨. 꼭 없어졌다간 다음날 아침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다시 나타나곤 한답니다. 항상 그러지만 그럴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답니다."
"기다리면 내일 아침에 또 나타나시겠죠. 여기 좀 앉으시죠."
나는 침대를 가리켰다. 알지도 못하는 이방인 주제에 너무 나선다 싶었지만 저녁나절 들은 노인의 이야기가 괜히 마음에 걸렸다. 마리는 램프를 탁자에 놓고 침대 가에 앉았고 나는 구석에 있는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에 놓고 앉았다.
"영감님이 여기에 여관을 차린 게 언젭니까?"
"저도 모르지요. 제가 여기 온 게 한 10년 됐는데 그 훨씬 전부터 여기서 살았다니까요."
"그럼 그 전에는 혼자 사셨답니까?"
"글쎄요? 전에 있던 사람의 말로는 아내도 있었다고 하던데..."
"영감님의 방은 어디죠?"
"3층 제일 끝방이에요."
"한번 가봅시다."
나는 램프를 들고 일어섰다.
"가봤자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리 역시 걱정이 되는지 따라 일어섰다.

삐거덕거리는 나무계단을 오르는데 벽틈으로 바람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노인의 방은 작았다. 한쪽으로 닫힌 창이 있고 침대 하나와 옷장 하나, 그리고 둥근 탁자와 작은 나무의자가 전부였다.
나는 램프를 탁자 위에 놓고 방을 둘러봤다.
"옷장을 열어봐도 될까요?"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 옷장은 습기를 먹었는지 열기가 힘이 들었다. 그러나 잠겨있지는 않았는듯 금방 열 수 있었다. 옷장 안에는 허름한 옷 몇벌이 있었고 구석에는 작은 나무상자가 놓여있었다. 나는 그 상자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놨다.
"이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아십니까?"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근심에 차있었다.

작은 상자는 몹시 낡아서 겉의 칠이 다 벗겨졌고 못에는 녹이 잔뜩 슬어있었다. 그리고 투박하게 생긴 자물쇠가 채워져있었지만 이리저리 비틀다보니 장석이 통채로 빠져버렸다.
"이런... 하나 마련해드려야겠군..."
씁쓰레하니 웃으며 상자를 열었다.
얄팍한 종이뭉치. 그리고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종이뭉치를 꺼내들고 무언가 더 없나 싶어 상자 안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러나 종이뭉치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종이뭉치를 들여다봤다.

알아보지 못할 글자들이 가득했다. 종이들을 뒤적이다 보니 맨 마지막에 아름다운 젊은 여인의 초상화가 나왔다. 꽤 고급스러운듯한 낡은 양피지에 그려져 있었는데 양피지 둘레로 아름다운 문양이 둘러져있었다. 그것밖에 없었다. 나는 초상화가 그려진 양피지를 찬찬히 들여다봤지만 초상화의 주인공인듯한 이름이나 화가의 사인도 없었다.
종이뭉치를 다시 상자 안에 넣고 잘 닫은 다음 옷장 안 원래 자리에 넣었다. 옷장을 닫고 마리를 돌아다보니 그녀는 여전히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방 안을 좀더 찾아보았지만 더이상 단서가 될만한 것은 없었다.
"걱정마십시오. 내일 다시 돌아오시겠죠."
그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마리와 같이 일층으로 내려왔다. 비바람은 여전히 건물을 할퀴어가고 있었다.
마리에게 커피를 부탁해놓고 나는 현관문 앞에 섰다. 빗물이 새어 들어와 바닥의 빌로오드가 검게 젖어있었다. 나는 문을 약간 열어봤다. 빗물이 들이쳐 옷이 한번 더 젖었다.
탁자에 앉아 마리가 갖다준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바람소리가 좀 잦아들었다. 다시 현관문을 열어봤다. 거짓말처럼 비바람이 멎어있었다.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새 구름까지도 개어 검은 하늘에 별들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벼랑 끝까지 걸어가봤다. 발밑의 풀들이 젖어 누워있었고 군데군데 웅덩이가 고여있었다.
검붉은 바다는 완전히 검은 색으로 변해 보석같은 별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나는 노인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봤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런 밤에는 어부의 영혼이 저 바다 밑에서 자기의 사랑하는 연인 옆에 누워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영원히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오직 둘만의 사랑만을 생각하면서.
북국의 밤공기는 무척 차가웠고 나는 추위에 쫓기듯 다시 방으로 올라왔다. 노인이 무사하길 바라며.

며칠이 지나고 내가 그 언덕의 낡은 여관을 떠날 때까지도 노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돌아가는 마차 속에서 흔들리며 창밖으로 보이는 검붉은 바다를 보고 있었다.
나는 창으로 고개를 내밀어 마부에게 소리쳤다.
"그 영감님이 여기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아십니까?"
"아뇨, 아마 아무도 모를걸요!"
나는 다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침엽수림 사이로 난 길로 마차가 들어섰고 내가 그 검붉은 바다를 본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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