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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의 크리스마스 캐롤] 이야기 소묘 - 2006년 03월 09일 14시 36분
2006년 03월 09일 14시 36분 2006년 03월 09일 14시 36분
겨울이 따스하다고 하면 아마 도시 영세민들은 무슨 헛소리냐고 당장 들고 일어날 것이다.
그들의 설운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하여튼 겨울만 되면 나는 까닭 모를 따스함을 느끼곤 한다.
내가 겨울을 좋아하는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다. 너는 뭐 변변찮은 여자친구 하나 없으면서 이 추운 겨울을 어떻게 나려고 그러냐? 나는 뭐라고 할 말이 없어진다.
그렇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이 추운 겨울이 여자친구 하나로 따스해진다는 친구들의 근거없는 헛소리에 쓸데 없이 귀기울이지도 않는다. 나로 인해 나는 스스로 이 겨울을 따스하게 덥히는 데 신경쓸 뿐이다.
그래도, 그래도 여자친구 하나 정돈 있어도 좋겠지...
전에 아르바이트하던 커피숍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새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야 했지만 나는 잠시나마 아무 일도 않고 쉬기로 했다. 그렇게 벌써 1주일을 보내버린,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하는 12월 24일이었다. 철저한 현실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우리 삼촌은 종교적인 명절은 다 없애버려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시지만, 왜일까? 남들이 특별하게 여기는 이 날에 나 역시 무슨 일이 생기기를 바라는 것은.
그런 식의 막연한 기대 때문에 나는 오늘 하루종일을 거리에서 보내고 있다. 혼자서, 거의 12시간을.
그러나, 밤 10시가 넘어가고 시내를 네번 가량 돌자 나는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아무 일도 안일어난 데 대해 먼저 화가 났고 이렇게 요행이나 바라면서 하루를 쓸 데 없이 보내버리고 있는 나 자신에 더욱 화가 났다.
나는 버스 정류장에 사람들과 같이 모여 서 있었다. 사방의 상가에선 크리스마스 캐롤이 화려한 불빛과 함께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주위에 오가는 사람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다들 한아름씩 꾸러미를 싸안고 깔깔거리고 있었다. 세상이 나와는 전혀 별개로 흘러가는 듯한 기분까지 드는 것은, 당연한 거겠지.
사람들이 잔뜩 들어찬 버스가 수도 없이 왔다갔다 했다. 나는 선뜻 버스에 올라타지도 못한 채 거기에 계속 서있었다. 이 가치 없는 짓거리를 계속 해야하나 하며.
허리에 찬 삐삐가 울었다. 집에서 빨리 들어오라는 연락. 나는 무시하기로 했다. 막상 집에 들어가려니 길거리에 버린 시간들이 너무 아까왔다. 너무 아까와서 나는 버스정류장을 떠나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전화 부스 옆을 지나며 누구 불러낼 사람이 없나 생각했지만 그만 두기로 했다. 이런 날 집에 붙어있을 사람도 없으려니와 설사 부른다 해도 10시가 넘은 시각에 나올 사람도 없었으므로. 나는 내가 제정신을 차릴 때까지 이 한숨 나오는 방황을 혼자서 계속해야 했다.
그러다가 문득 지금 시각에 불러내면 나올 것 같은 사람이 생각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여자가. 한참 전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알던 여자인데 호프집 아르바이트를 그만 둔 뒤에도 한동안 계속 사귀던 여자였다. 비록 겨울이 시작될 때 전화를 안했다는 이유로 어정쩡하게 헤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불러내면 나올 거야. 집에만 있다면 말이야. 반갑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 뭐 어쩌고, 몇마디 너스레를 떨어대고... 하면서 나는 전화부스를 쳐다보며 그 자리에 그냥 서 버렸다. 아마 한참을 서 있었을 것이다. 한 10 분 가량. 여전히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사방으로 퍼지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깔깔댔으며 차들이 찬 공기를 가르고 달리며 빵빵대고 있었다. 부스 안에 있던 여자가 겨우 전화를 끊고 나왔다. 그렇지만 나는 계속 그 자리에 서서 물끄러미 불켜진 부스 안의 전화통만 쳐다보고 있었다. 금방 사람들이 몰려와 전화 부스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다섯 명의 사람들이 부스 안과 밖에서 서로 떠드는 것을 보며 발을 돌렸다.
뭐 아무 일도 없으면 어때...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앞으로 뒤로 지나가는 틈새를 다시 헤집으며 걷기 시작했다. 이대로 크리스마스를 맞자. 그것도 즐거운 일일 거야. 그런데 저만치 앞에서 걸어오는 여자에 눈이 멎었다. 그녀는 쇼핑백 하나를 들고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이리로 오고 있었다. 나는 금방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러면서 혹시나 그녀가 나를 알아보지나 않을까하는 기대감을 서서히 떠올렸다. 알아볼 지도 몰라. 겨우 한 달이 조금 넘었는걸. 나는 그녀의 눈치를 계속 살피면서 되도록이면 그녀에게 눈길을 맞추지 않으려 노력하며 걸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사람이 참으로 많았다. 그 사람들이 하나하나 지나가면서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도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이제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웃음 소리도 느껴지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이브엔 무슨 일이 있을 거야. 길거리에 버린 12시간이 별로 아깝지도 않을 거야. 그래, 결국은 보람이 있었어.
그녀는 여전히 눈을 내리깐 채 바로 내 옆을 지나갔다.
그녀를 지나치고 대여섯 발짝 더 가서 뒤를 돌아봤다. 그녀는 저만치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이 화려한 장식과 함께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아주 잠깐 그 자리에서 서 있었다. 지금 달려가 아는 체를 할까하며. 하지만 나는 그녀가 오던 방향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뭐 이대로 크리스마스를 맞는 것도 괜찮겠지. 어디 포장마차에 가서 소주나 먹으며 다리쉼 좀 할까?
나는 걸으면서 하늘을 올려다 봤다.
눈이나 좀 오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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