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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 이야기 소묘 - 2006년 03월 09일 14시 37분
2006년 03월 09일 14시 37분 2006년 03월 09일 14시 37분
"야...넌 임마 왜 그렇게 말해?"
동아리 방문을 꽝 닫고 나가는 미희와 허둥대며 쫓아나가는 재원이의 뒷모습을 무안하게 보고만 있던 나는 기수를 쳐다봤다.
"설마 저런 반응이 나오리라고는...."
기수는 기가 막히다는 얼굴을 숙이고 발로 방바닥을 긁었다. 나는 갑자기 몸둘 바를 몰랐다. 농담 한 마디 한 것이 이렇게 사람을 나쁜 놈 만들 줄이야...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것이고 나는 나로 인해 일어난 이 일을 어떤 식으로든 무마를 해야만 했다.
기수는 벽에 붙어있는 의자에 가 앉더니 담배를 피어 물었다.
"서로에 대한 불신만 더욱 늘어가는 거 같아."
"불신이 아니야. 신경들이 곤두서서 그렇지."
나는 낡은 석유난로 가로 의자를 끌어당겨 앉아 시계를 봤다. 5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찾아가서 미안하다고 해야겠어."
나는 석유가 없어 차가운 난로 위에 건성 손을 쬐며 변명투로 말했다.
"뭐라고 할 건데. 자만이었다고?"
"너까지 그런 투로 말하냐?"
기수는 후하고 담배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나는 기수를 노려보던 눈을 다시 난로로 돌렸다.
선거와 시험도 끝나고 종강한 겨울의 학교는 어디든지 추웠다. 특히 올해처럼 선거에서 진 겨울은 더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학교에 붙어있던 버릇들을 고치지 못하고 일주일에 사나흘은 학교를 나와 겨울바람만큼이나 썰렁한 교정과 동아리방을 지키며 술을 먹었다. 학교는 우리를 반겨주지 않는 듯했다.
교직원 사무실에서는 결코 난로를 때울 석유를 주는 적이 없었으며 우리는 빈 동아리 방문을 몰래 열고 들어가 타다가 남은 석유를 조금씩 모아다가 때우곤 했지만 그만큼의 석유로는 추운 겨울의 동아리방을 녹일 수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한해동안 이리저리 뒹굴려 때에 반들반들하게 절고 군데군데 토사물까지 묻어있는 다 떨어진 담요와 이불을 모아 도롱이처럼 만들어가지고 그속에 들어앉아 서로 이런 저런 얘기들을 했다. 그러다가 무료함이 모두를 엄습할라치면 제비를 뽑아 차비만 남겨놓고 모은 돈으로 슈퍼마켓에서 막걸리와 과자 등속을 사다가 벌려놓고 이불 속에 들어앉은 채로 술을 먹었다. 그러다가 술이 얼만큼 취하고 추위가 말할 수 없이 싫어지면 그 이불을 몸에 둘둘 말아 그대로 자빠져 자곤 했다.
그러한 나날들을 보내며 우리는 선배들이 맡긴 선거에서의 전략적 결함에 대해 겉만 도는 토론을 했다.
기수가 담배를 문 채 재떨이로 쓰는 지저분한 500cc짜리 호프잔을 가져와 난로 위에 올려놨다.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한개비 뽑아 물고는 옆에 놓아둔 가방에서 탁??꺼냈다. 다 본 신문을 길게 찢어 호프잔에 쑤셔넣고는 담배불을 붙인 라이터로 불을 댕겼다. 신문지는 조금 불붙다간 연기만 내며 곧 꺼졌다.
계속 불을 붙이는데 기수가 한마디 했다.
"그만 해라."
나는 기수의 얼굴을 한번 쳐다 보곤 라이터를 외투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호프잔 속의 타다 만 거뭇거뭇한 신문지 위로 담배연기가 어렸다.
동아리방에서의 시간은 늘 이런 식이었다. 정오가 넘어 어슬렁거리며 한두명씩 학교에 나타난 우리들은 그래도 햇살이 내리쬐는 겨울 오후의 시간들을 잡담이나 독서나 혹은 당구나 오락등으로 대충대충 보내고 있었다. 단지 그저 나오는 것만으로 자신의 의무는 다했다는 듯.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우리 모두가 우리가 하는 행동들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잡담이나 독서나 당구나 오락 등이.
어쨌든 나는 담배 한 대를 다 태우고 나서 미희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러 가야할 판이었다.
"현사연에 사람들 있디?"
나는 일어나며 기수에게 물었다.
"글쎄... 아까 영식이형하고 재원이 있던 것 같던데..."
나는 그림패 방문을 나서 현사연 쪽으로 향했다. 가건물로 되어있는 동아리 동은 가로로 길쭉해 그 길쭉한 양 면으로 해서 문들이 다닥다닥 나 있었고 그림패와 현사연은 서로 길쭉한 양 끝쪽에 붙어 있었다.
나는 콧등을 에일듯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을 받으며 가건물의 벽쪽으로 붙어 걸어갔다. <한국 현대사 연구회>라고 쓴 아크릴 판이 붙은 문에 이르자 문을 두드려봤다. 손가락이 철제문에 부딪히자 손가락 뼈마디가 부러질 듯 아팠다.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냥 문을 열고 들어섰다.
동아리방 안에는 영식이형 혼자 신문을 보고 있었다. 방 안을 한번 둘러보고 다시 나가려고 하는데 영식이형이 불렀다.
"왜요?"
"책 다 읽었니?"
"아직요."
"내일 모레다."
"예."
그러나 영식이형이 세미나해주기로 한 그 책을 나는 아직 반도 채 못읽었다. 밖으로 나가 문을 닫으려다가 다시 열었다.
"영식이형."
"왜."
"혹시 미희 못봤어요?"
"아까 3시쯤 봤다."
문을 닫았다. 손을 올려 차가운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머리칼 사이로 바람이 지나갔다.
왜 우리는 서로들 이렇게 냉랭하게만 대하는 걸까... 그것은 서로가 춥기 때문이지. 자기 자신을 돌보는데 너무 정신을 팔고 있어서 미처 옆 사람을 챙겨줄 여유가 없는 것이야. 그저껜가 술자리에서 들은 얘기였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자식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놈들이 있기 때문이야! 알어?
가건물 바로 옆에 있는 3호관에서 재원이와 미희가 자판기 종이컵을 들고 웃으며 오고 있었다. 재원이가 내 대신 사과했나보다... 그러나 나는 외투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쭈삣거리는 발걸음으로 둘을 향해 걸어갔다. 미희에게 진짜로 사과를 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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