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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완벽한 날] 이야기 소묘 - 2006년 03월 23일 11시 58분
2006년 03월 23일 11시 58분 2006년 03월 23일 11시 58분

바람은 흙맛이다.
시커먼 하늘에서 불어내려오는 바람은 짓다만 건물의 콘크리트 외벽을 긁고 내려오며 갈래갈래 찢어지고 그 가운데 한 가닥이 열린 내 입으로 들어온다.
사그락거리는 작은 흙가루들이 혀 위를 구른다. 아래턱을 끌어올리자 어금니 사이로 더욱 잘게 부서지는 흙가루들이 느껴진다. 흙가루들은 매마른 목구멍을 타고 육체의 한가운데로 추락해 내려간다.
입을 닫아도 여전히 바람은 흙맛이다.
빗방울 하나가 뺨 위로 떨어진다.
시커먼 하늘에서 바람을 타고 내려오는 빗방울이 보인다.
빗방울은 그 춤추는 듯한 떨림을 알아채기도 전에 눈앞에 나타난다.
나는 눈을 감는다.

아침은 끔찍했다.
어제의 기억은 도무지 어디서 끊어진 가닥을 이어 붙여야 될 지도 모를 정도로 토막나버려 있었다.
나는 함께 누워있던 그 벌거벗은 몸뚱이가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침대에서 살그머니 일어나 숨을 죽이며 옷을 찾아 꿰입어야 했다. 욕지기가 치밀었고, 화장실의 소음이 그 여자를 깨울까봐 두려워 목구멍을 애써 틀어막으며 방을 나설 수 있었다.
모텔이라는 이름을 가진 시내의 그 숙박업소의 복도는 퀘퀘했고 또 조용했다. 운동화의 고무밑창이 바닥과 만나는 소리가 복도를 떠돌았다. 나는 그 작은 소리마저 여자를 깨울까봐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perfect day.
사람이 없는 빈 카운터에 이 노래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나는 카운터 앞 바닥에 침을 뱉고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도 모텔은 어제 그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나는 서둘러 회사로 향했다. 카운터 옆을 지나며 본 시계는 이미 10시를 한참 지난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고 휴대전화는 배터리가 다 닳았는지 꺼져있었으며 아마도 오래된 전화카드가 한 장 정도 남아있을 지도 모르는 지갑은 빌어먹게도 그 여자가 자빠져있는 모텔 방 안에 있을 터이기 때문에 오늘 지각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한 그 자식에게 책 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덜 늦어야 될 판이었다.
예상대로 그 자식은 날 보자마자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나는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의자를 끌어앉으며 조그만 목소리로 죄송합니다,를 되뇌었지만, 조금 뒤 메신저로 날아온 점심먹고 잠깐 보자는 그 자식의 나에 대한 용건은 가볍게 넘어가지 않을 위협이 담겨 있었다.
내가 날려먹은 두 시간 가량의 시간을 어떻게든 만회해 보려는 내 노력은 여기서부터 허사가 됐다. 거기다가 제대로 씻지를 못해 텁텁한 입안과 근질거리는 얼굴조차 내가 해야 할 단순입력작업을 방해하고 있었다.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아 화장실로 달려가 대충 입안을 헹군 다음 세수를 하고 고개를 들자 거울에 그 자식의 얼굴이 나타났다.
"뭐냐?"
그 자식은 씹다가 뱉듯이 말했다.
"뭐냐고. 넌 뭐냐는 말이다."
이 상황에서 '나는 나'라는 식의 대꾸를 날릴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저 입을 닥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말이 말같지 않냐? 너 뭐냐고!"
그 자식의 머리칼은 짧게 쳐져 온통 삐죽삐죽 서있었고 그 아래 이마에는 자잘한 여드름이 대여섯개 골고루 흩어져 자리잡고 있었다. 숱이 적은 눈썹은 가늘기까지 했으며 어울리지 않는 동그란 눈은, 그 인상과는 너무나도 안 어울리게 생겨서 쳐다볼 수록 웃음을 터트리고 싶게 생겼다. 납작한 코와 툭 튀어나온 광대뼈에는 거뭇한 모공이 너무나도 눈에 잘 뜨였고 별 특징없이 생긴 입술이 빠른 아래턱 위에 약간 일그러져 있었다.
"왜요."
나도 모르게 이 말이 튀어나왔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나와버린 말이었다. 잠깐 사이 이 말을 만회해볼까하는 생각을 했지만 관두기로 했다.
"왜요?"
예상했던 대로 말꼬리가 심하게 쳐올라가는 대답이 돌아왔다.
"너 지금 나랑 장난치자는 거냐? 왜요?"
그 자식은 거울로 시선을 옮겨 헛웃음을 흘렸다.
"왜요? 아, 씨발새끼...."
그래, 결국 이런 상황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더 이상 생각하기를 관두기로 했다. 조금 전부터 머리가 아파왔으며 내 지각으로 인해 팀 분위기가 어떻게 되든지도 신경쓰기 싫어졌으므로.
"됐어요."
이 말 한 마디로 나는 모든 상황을 종료짓고 싶었다. 그래서 그 자식의 손이 날아와 화장실을 나가려는 내 셔츠를 나꿔챘을 때는 약간 기분이 상했다.
"뭐야, 씨발. 지금 뭐하자는 플레이야!"
나는 내 셔츠를 움켜잡은 그 자식의 손을 쳐 떨어트렸다.
"됐다구요!"
그리고 나는 화장실을 나섰다. 미련은 없었다. 지난 달을 포함한 남은 급여는 못받겠지만 어차피 3개월 계약으로 들어온 팀이고 이 프로젝트는 다음 다음 달까지 질질 끌테니 그때가서 지겨워져 때려치느니 지금 깔끔하게 도망쳐버리는 편이 나았다.
내 뒤로 화장실 문이 왈칵 열렸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지갑은 당연히 없고 담배도 없었으며 있는 돈이라고는 바지 주머니에 남아있는 750원이 전부였다. 나는 동전을 넣는 공중전화를 찾아 어제 만났던 사람 가운데 그나마 친근한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녀석과 점심시간에 녀석의 회사 근처에서 보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쓰렸다.
녀석의 회사까지 세 블럭을 걸어가야 했다. 아직은 공기가 서늘한 봄날이었지만 비척거리며 세 블럭을 걷다보니 관자놀이에 땀이 흘러내렸다. 녀석은 자기 회사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우리는 근처에 있는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마주보고 앉아 라면과 김밥을 시켜놓고 난 녀석에게 말했다.
"어제 기억이 안나."
심드렁하게 주위에 붙어있는 메뉴판을 보던 녀석이 말했다.
"뭐가?"
"어제, 어떻게 됐는지 기억이 안나. 아침에 어디서 일어났는지 알아?"
"길바닥?"
말해놓고선 녀석은 실실 웃었다.
"그년이랑 모텔에서 자고 있더라고."
녀석의 눈이 커졌다. 녀석은 고개를 낮추며 조용히 물었다.
"했냐?"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아. 도대체 애초에 왜 그년이 우리 자리에 왔느냐부터가 궁금해."
녀석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입맛을 다셨다.
"사실 나도 잘 몰라. 화장실 갔다와보니 걔네들이 껴있더라고. 뭐 자기 여자친구랑 같이 왔으니 껴줬겠지만 말야."
그랬겠지. 그 여자는 그렇게 은근슬쩍 나에게 접근했고, 그리고,
"아무튼 그년이 낀 다음부터 기억이 안나."
"너 보기엔 멀쩡해 보였어. 아무튼 끝나고 나갔는데 정신차려보니깐 너 없더라고. 걔는....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설마 둘이 같이 있었을 줄이야...."
할 말이 없었다.
라면과 김밥이 나왔고, 우리는 말 없이 그것들을 먹었다.
회사로 다시 들어가는 녀석에게 나는 만 원을 빌렸다.
"지갑은 찾아야되지 않겠냐? 카드나 뭐 이런 거 있지 않아?"
신용카드가 하나, 현금카드가 하나 있지만 신용카드는 막혀있고 현금카드는 상관없었다. 어차피 통장엔 잔고래봤자 몇백 원 있을테지. 하지만 녀석은 계속 말했다.
"웬만하면 지갑 찾는게 낫겠다. 아무리 그 여자애 보기 싫어도 민증 또 만드려면 돈 들어가잖아. 그리고 얘기해봐서 여기 자리 날 거 같으면 연락해주마."
나는 녀석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줬다. 어찌됐건 돈은 벌어야지.

머리가 계속 아파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지갑이 걸렸다. 편의점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사며 급속 충전기에 휴대전화를 걸어놓았다. 담배를 피우며 10분 정도 기다린 뒤에 전원을 켜보니 모르는 전화번호로 세 통의 전화가 와있었다. 나는 한참동안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고 결국 먼저 전화하기를 포기했다. 대신 어디에서 시간을 때우며 그 여자의 전화를 기다리기로 했다.
근처의 피씨방으로 들어서는데 전화기가 울었다. 발신번호는 낯이 익었다. 아마도 오전에 때려치고 나온 회사의 팀장 전화일 듯했다. 난 전화를 무시하기로 했다.
한 시간 가량 하릴 없이 게임을 하고 있자 다시 전화가 울었다. 번호를 보니 부재중으로 왔던 그 번호였다. 그 여자다 싶어서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경우를 가리키라고 준비된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멀찍이 떨어진 골목 어귀에 서서 지켜보는 모텔 앞의 풍경은 참 가관이었다. 상업지구이기 때문에 동네사람들이라고 할만한 사람이 별로 없을텐데도 어디서들 기어나왔는지 트레이닝복에 티셔츠 쪼가리 걸친 사람들이 우우 모여서 모텔 입구 쪽을 구경하고 있었고 아침에 쫓기듯 나왔던 바로 그 모텔 현관 앞에는 경광등을 번쩍이는 빽차가 두 대, 봉고차가 한 대, 그리고 요란한 구급차가 한 대 와서 여기 뭔 일이 터졌음을 소리높여 광고하고 있었으며 그 주위로 아까 나에게 전화를 걸었을 형사가 섞였을 일단의 사내들이 뭔가 바쁜척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지갑을 깨끗이 잊기로 했다. 전화번호도 알았으니 집주소 알아내는 거야 저 치들에겐 간단한 일이겠지. 한가로이 저녁 시간에 거실에 누워 텔레비젼을 보고 있을 때 갑자기 구두발로 들이닥쳐 미란다 조항인지도 안읊어주고 다짜고자 손에는 수갑을 채우고 머리에는 검은 비닐봉지를 뒤집어 씌운 채 봉고차 뒤자리에 쑤셔박혀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가......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머리가 너무 아팠고, 제대로 씻지도 못한데다 돌아다니느라 땀을 흘린 탓에 몸 여기저기가 근질거리기 시작했기에 나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시원한 쥬스를 한 컵 마시고, 이 두통이 싹 가실 때까지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지하철 역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20분 쯤 뒤, 나는 내 앞에 놓인 상황에 대해서 욕지거리를 내뱉어야만 했다.
한낮의 지하철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나는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아 몸을 웅크리듯 사리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잠시 있었지만 잠은 오지 않고 머리는 더욱 아파왔다.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그 여자를 보고 말았다.
굳이 어제밤의 끊어진 기억을 되새길 필요도 없었다. 그 여자의 라임색 가죽자켓을 본 순간 그 옷에 관련된 어제밤의 잊고 있던 상황이 머리속에서 빠르게 재생됐다. 그리고 그 얼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새까만 생머리 앞으로 비스듬하게 보이는 그 여자의 옆얼굴은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나는 아침에 모텔방에서 일어났을 때부터 피씨방에서 받은 형사의 전화, 그리고 모텔 앞에서 바글거리던 경찰들을 차례대로 떠올렸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분명히 우연하게도 심하게 닮은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그 여자의 모습은 내 눈을 계속 붙잡고 있었고, 나는 이대로 그냥 집으로 가 편하게 쉬든지 아니면 지금 저 여자가 내리려고 하는 역에서 같이 내려 도대체 이게 어떤 상황인지 알아보든지를 결정해야만 했다.
머리가 아팠다. 눈을 계속 그 여자에게 둔 채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짚고 손가락으로 세게 누르기 시작하는데 그 여자가 내 쪽을 돌아봤다. 나는 피가 얼어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 짧은 순간에 온몸에서 식은땀이 배어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열차가 역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집까지 반도 오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가 열차에서 내려 내 눈 앞을 지나가는 모습을 맞은편 유리창으로 보는 순간 나는 결정을 해버렸다.
문이 닫히기 직전 나는 황급히 승강장으로 뛰어나왔다. 열차가 출발하는 소리 사이로 여자의 구두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승강장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나는 여자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지나 않을까 걱정하며 일부러 시선을 맞은편 승강장쪽으로 준 채 천천히 여자의 뒤를 쫓았다.
미행이라는 것은 그리 재미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들키는 것과 놓치는 것 사이에서 계속 긍긍대며 여자의 뒤를 쫓았고 그 행위는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가져다 줬으며 당연히 두통은 더욱 심해졌다. 그래서 지하철역 계단을 다 올라와 시끌벅적한 차소리를 들으며, 난 여자의 행방을 찾기 전에 계단 옆 기둥에 이마를 대고 잠깐동안 치밀어오르는 욕지기를 다스려야 했다.

그 여자의 라임색 가죽자켓은 금방 눈에 띄었다. 나는 좀 더 여유있게 쫓기로 마음먹고 천천히 여자의 뒤를 따랐다.
주위는 시장이었다. 왕복 4차선 도로 양쪽으로 노점상과 납작한 건물들이 빼곡했고 사방에 소음이 가득했다. 사람들 사이로 걸어가는 그 여자를 눈으로 쫓기는 쉬웠지만 나는 곧 봄날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마저 힘에 겨워졌다.
헐떡거리며 사람들 사이를 피해 여자의 뒤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덧 한산한 주택가가 나왔다. 여자는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저 앞에서 똑바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저만치에서 가게를 발견하고는 거리를 약간 좁힌 다음 음료수를 하나 사 마셨다. 가게 앞에서 여자의 뒷모습을 주시하며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데 여자가 갑자기 옆으로 난 골목으로 사라졌다. 나는 남은 음료수를 입안에 털어넣고는 황급히 여자가 사라진 골목으로 걸어갔다.

발걸음을 꺾어 골목으로 접어드는 순간 눈앞에 뭔가가 번쩍했고 나는 곧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불쾌한 느낌을 받았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 앞을 봤다. 여자는 양손으로 핸드백 끈을 단단히 움켜쥔 채 나는 쳐다보고 있었고 그 눈은, 마치 도저히 하기 싫은 살인을 곧 해야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처럼 번쩍이고 있었다. 그런 눈을 마주 쳐다보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끔찍한 경험이었다. 등골을 타고 서늘한 느낌이 흘렀다.
"개새끼!"
여자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맨날 네 뒤를 쫓던 사람의 뒤를 쫓는 느낌이 어때? 응?"
햇볕은 이상할만큼 따사로왔지만 내 몸의 한기를 없애주기엔 모자랐다. 여자가 한걸음 다가왔다.
"네가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본 느낌은 어때? 응?"
자기가 한 말에 대한 거듭된 확인, 그 여자의 말버릇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서 나를 죽일듯이 노려보는 이 여자는 그 여자가 아니었다. 닮았지만, 아니 닮았다는 말이 무색할만큼 똑같이 생겨지만, 그 여자가 아니었다.
나는 따사로운 햇살에 어울리지 않는 한기를 느끼며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머리가 미쳐버릴 것처럼 아파왔고 뒤로 돌아 마구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분명히 죽고 말 거라는 확신도 들었다.
"....넌...."
간신히 입을 뗐지만 목소리는 목구멍에 걸려서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다시 욕지기가 치밀었다. 그 여자의 시선을 무시하고 허리를 숙여 토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갑자기 필사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나서, 어제밤부터 꼬여버린 이 시간에서 벗어나야 했다. 살아나려면 무슨 말이든 해서 이 상황을, 봄날 오후의 햇살이 내리쪼이는 이 끔찍한 상황을 깨어버려야 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죽고 싶도록 해주겠어. 죽고 싶지만, 절대 죽을 수 없도록 해주겠어."
여자의 목소리는 오히려 차분하게 들렸다. 나는 이제 울고 싶어졌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눈 앞은 검은색이다.
등을 대고 누워있으니 오히려 편안한 기분까지 든다. 계속 누워있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나는 일어나야만 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팔과 다리를 움직여 본다. 거기 있지만 사실은 거기 없는 것처럼 낯선 느낌이다.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기분은 평온하다. 계속 이대로 누워있으면 안되나 싶어진다. 하지만 일어나서 움직여야만 한다.
다시 팔다리를 움직여 본다. 여전히 움직이는 것만 같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머리를 들어 몸 아래쪽을 내려다 봐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냥 이대로 가만히 누워 편안함을 즐기고만 싶다. 그리고 갑자기 말할 수 없는 공포가 밀려온다. 도저히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 떠오른다. 머리 속이 순간 하얗게 표백되고 아우성치는 비명소리가 귀 속으로 밀려든다. 나는 눈을 뜬다. 눈을 뜨고 있었는지 감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눈을 뜬다. 여전히 눈 앞은 검은 색이다.
공포는 무척 길다. 나는 내 것인지 아닌지도 모를 숨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음악소리도 듣는다.
공포는 이제 나에게 그냥 편하게 누워있으라고 한다. 얼굴에 빗방울이 떨어지자 나는 겨우 숨을 가라앉힌다. 음악은 달콤하다. 들어본 음악이다.
perfect day, 루 리드의.
나는 이제 일어나려는 노력을 그만 둔다. 그래, 그냥 이렇게 누워만 있으면 되는 거였다.
빗방울이 얼굴을 톡톡 두드린다. 바람에 춤추는 빗방울은 눈 앞에서 잠깐 몸을 흔들다가 얼굴에 내려선다.
이제 내 몸은 서서히 가라앉는다.
하지만, 괜찮다.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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