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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이야기 소묘 - 2006년 03월 09일 14시 40분
2006년 03월 09일 14시 40분 2006년 03월 09일 14시 40분

[그녀는 그날도 활엽수가 가로수로
거리 양편에 자리 잡은 그 거리에서,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활엽들이 이루는
아늑한 그늘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수백 회의 전투를 묶은 전쟁에서 막 돌아온 그는
거기에서 에테르를 호흡하며 서있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바람의 신의 다섯 딸 중 셋째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바람이 없어도 휘날리는 투명한 머릿발을 그대로 풀고
역시 바람이 없어도 나풀대는 투명한 원피스를 입고
활엽 가로수 그늘 아래에 그린 듯 서있었다.]

[그는 전장에서 인간들을 죽여
아직도 피투성이인 두 손을 하고 피곤에 지쳐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웃고 있었고,
그는 울고 있었다.]

[그녀는 활엽 가로수 그늘에서
그는 그 그늘의 경계선 밖에서 만났다.]

[백 수십 년만의 조우인 듯 그들은 너무나도 어색했고,
서로에게 어색했고,
자신에게 어색했고,
햇살이 하얗게 뿌리는 거리에 어색했다.]

[그는 그 어색함을 깨기 위해
그가 오른손이라고 믿는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가 오른손이라고 믿고 내민 손을 중심으로 세계가 깨어지기 시작했다.]

[그늘이, 활엽 가로수가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나면서 만들어내던 그늘과,
그 속에서 바람이 없어도 휘날리고 나풀대는 투명한 머릿발과 투명한 옷의 그녀가 짓는 웃음과,
하얀 햇살을 받아 그늘을 만들어내던 활엽 가로수가,
그리고 그 모두를 감싸고 있는 고요한 거리가 모두
깨어졌다.
산산히]

[깨어진 거리에서
깨어진 활엽수가 깨어진 하얀 햇살을 받아 만든
깨어진 그늘 아래에서
깨어진 웃음을 짓는 그녀에게 그는
전쟁에서 수많은 인간들을 죽여 피투성이인 두 손을 내밀었다.]

[활엽수의 이파리가 햇살을 받아 유달리 하얗게 빛을 발하던 그날 오후,
활엽수의 이파리가 햇살을 받아 만들어낸 그늘 아래에서
그는 바람의 신의 다섯 딸 가운데 셋째인 그녀의 목을 졸랐다.]

[산소와 질소 대신 에테르를 호흡하는 그녀는
그의 열 손가락 사이에 가느다란 목을 내맡긴 채 백열의 태양 아래에서 천천히 죽어갔다.]

[그리고 왼쪽과 오른쪽을 분간하지 못하는 그는
그의 열 손가락 사이에서 천천히 죽어가는 그녀의 가느다란 맥박을 감지하며
난생 처음으로 쾌락을 느꼈다.]

[활엽 가로수의 이파리가 햇살을 받아 유달리 하얗게 빛을 발하던 그날 오후의 거리에는
그렇게 그와 그녀 둘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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