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경, 울온을 즐길 당시에 썼던 겁니다. 카테고리가 썰렁해보여서 재활용해봅니다.*
3.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었다. 머리 위로 새 한 마리가 지저귀면서 날아갔다.
나는 깔고 잔 침낭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을 보았다. 내 배낭에는 침낭이 세 개나 더 들어있었다. 침낭은 한번 쓴다고 닳아서 없어지거나 하지 않는 물건이었다.
나는 침낭값을 아까워하면서 아침의 쓴 입맛으로 어제밤에 구워둔 새고기를 몇 개 뜯어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참을 걸어 해가 서펜츠 스파인 꼭대기에 걸렸을 때 난 드디어 브리튼의 가드보호구역 안으로 들어섰다.
수도 브리튼으로 들어서는 길목은 양쪽으로 깎아지른 돌산이 솟은 좁은 산길이었고 길 군데군데엔 제련되지 않은 광석들이 여기저기 너저분하게 널려있었다. 나는 그것들 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문득 오빠 블루어리츠가 생각났다. 어쩐지 이곳 어디선가 곡괭이를 들고 열심히 땅을 파고 있지는 않을까, 오빠도 나처럼 뭔가를 하기 위해 이 대도시 어디선가 혼자 수련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혹시라도 길가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했으면하는 바램이었지만, 바램은 바램으로 놔두기로 했다.
산길을 지나자 넓은 밭과 농가들이 모여있는 마을이 나왔고 길을 따라 가는 동안 순박하게 보이는 농부들이 밭일을 하다말고 인사를 건냈다. 가라앉았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마굿간과 커다란 성을 지나 다리를 건너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떠드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바로 브리타니아의 교류의 중심지, 브리튼 서쪽은행이었다.
나는 눈이 휘둥그래지다 못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형형색색으로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자 마법사들, 근엄해보이는 남자 마법사들, 육중해 보이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전사들.... 그들은 모두들 말을 타고, 혹은 커다란 새를 타고, 혹은 눈과 입에서 불을 뿜어대는 시커먼 말을 타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처음 보는 물건들이 마구 버려져있었고 그중 몇몇 물건에는 뭔가 알 수 없는 기운이 어려있기도 했다. 너무나 정신이 없어서 갈피를 못잡고 있는데 갑자기 뒤쪽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무시무시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뒤를 돌아다보니 온통 시커먼 옷을 차려입은 마법사가 거대한 용을 두 마리나 끌고 오고있었다. 나는 황급히 은행건물 뒤로 돌아가 숨었다. 놀라움의 연속이었고 문화적 충격이었으며 온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나는 은행건물 모퉁이에 붙어서서 내 몰골을 찬찬히 내려다봤다. 형편없었다. 유의 가죽가게에서 싸게 주고 산 볼품없는 부츠에 스터디드 아머와 스터디드 암, 그리고 장갑이 내 차림새였다. 게다가 유에서부터 걸어오느라 옷들은 온통 먼지와 흙과 땀이 범벅이 되어있었다.
내 차림새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는데 급한 말발굽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내 옆으로 다가와 "Bank!!"를 외쳤다. 나는 깜짝 놀라 뒤로 황급히 물러나다가 뒤로 넘어져버렸고 내 옆으로 달려왔던 말탄 전사는 잠깐 말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더니 금방 은행상자를 뒤적거리다간 활과 수정구슬을 땅바닥에 내던지고는 다시 말을 달려 사라져버렸다.
나는 전사가 달려간 방향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전사가 내버린 물건을 쳐다봤다.
수정구슬은 뭣에 쓰는 물건인지 도통 감이 안잡혔고 활은 내가 집어들자 나에게 뭔가 강렬한 기운을 뿜어내는 듯 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나에게 알 수 없는 강력한 힘을 불어넣어준다고나 할까....
나는 화들짝 놀라 활을 내팽개쳤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내가 깎아만든 활을 쳐다봤다. 나 자신이 한심했다. 내 활은 벌써 한쪽이 갈라지고 있었고 활시위는 너덜너덜 했다. 그에 반해 전사가 '버리고' 간 활은 매끈하게 광택이 나면서 거기다가 알 수 없는 기운까지 내게 더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잽싸게 주위를 살피고 활을 집어들어 배낭에 넣었다. 갑자기 가슴이 뛰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그 자리를 피했다.
브리튼은 정말로 넓은 도시였다.
나는 천천히 포장된 길을 걸으며 집들과 간판들과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구경했고 로드 브리티쉬의 성에도 들어가봤고 박물관에서 말로만 듣던 8가지의 미덕에 대한 상징도 구경했다. 너무 돌아다녀서 팍팍해진 다리를 끌고 난 스위트 드림즈란 간판이 붙어있는 여관에 들어갔다.
브리튼의 여관은 엠패스 애비의 딱딱한 분위기의 여관과는 분위기부터가 틀렸다. 나는 푹신한 침대를 보자마자 그나마 남아있던 온몸의 힘이 완전히 빠져나감을 느꼈고 침대에 쓰러져 방문 밖의 소란스러움에도 개의치않고 그대로 곯아떨어져버렸다.
4.
개운하게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오래간만에 시원하게 목욕까지 하고나서 여관을 나섰다. 목욕을 해서 시원한 몸만큼이나 머리 속도 시원했다.
나는 브리튼 서쪽은행(정식으로는 The First Bank of Britain이라고 한다)에서 약간의 돈을 찾았고(엠패스 애비 은행에서 일하는 포도주 중독자 밥의 말에 의하면 브리타니아의 모든 은행들은 특수한 텔레포트방식을 이용한 온라인창구시스템을 갖추고 있는데, 이 시스템을 개발한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마법사 몬데인이었다고 한다. 다른 세계로부터 이방인을 불러 몬데인을 처치한 로드 브리티쉬는 최근 들어서 이 온라인창구시스템을 브리타니아의 마구간에도 적용을 시켰다고 하는데, 사실 로드 브리티쉬가 몬데인을 처치하게끔 한 가장 큰 이유는 이 시스템에 로얄티를 물기 싫어서라고 밥은 열변을 토했었지만, 난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믿거나 말거나.... 밥은 내게 그 얘기를 한 얼마 뒤에 유에서 볼 수가 없었다.) 그 돈으로 로드의 신사복 상점에서 천 염색약과 모자를 하나 사 파란색으로 물들여 머리에 썼고 가죽부츠도 물들였다. 그리고 마법상점에서 머리염색약도 하나 사서 푸석푸석한 색깔의 머리를 밝은 파란색으로 물들였다. 비록 갑옷까지 염색을 할 수는 없었지만,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물에 비친 내 모습은 그래도 꽤 많이 촌티를 벗고 있었다.
나는 한층 더 가벼운 마음이 됐고 사람이 붐비는 서쪽은행을 지나 남쪽으로 향하는 길로 들어섰다.
여관에서 나는 꿈을 꿨었다.
포도주에 취한 아버지는 달려드는 몽뱃과 스켈레톤에게 도끼를 휘두르고 있었다. 나는 엠패스 애비 옥상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옆에 나타난 어머니가 내게 활과 화살을 건냈다. 나는 최대한 잘 조준을 해서 화살을 날렸고 날아간 화살은 수십개로 분열을 하더니 아버지에게 달려드는 몽뱃과 스켈레톤 주위에 울타리처럼 꽂혔고 금방 유 트리로 변해 쑥쑥 자라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도끼를 꽉 쥐고는 나무로 솟구쳐오르더니 금방 수북히 쌓인 통나무더미를 만들어냈다. 나는 너무나 신이 나서 양조장의 포도주통에 화살을 쐈고 화살은 길다란 빨대가 되어 포도주통에 꽂혔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나는 그 빨대로 포도주를 빨아먹고 기분이 좋아져서 함께 웃고 떠들었다.......
브리튼의 남쪽 숲에서 천천히 트린식으로 향하면서 나는 가지고 있는 단검으로 날아가는 새들을 잡아서 깃털을 뽑았고 도끼로 나무를 패서 샤프트를 깎아 화살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새를 잡거나 나무를 패는 일이 귀찮아지면 나무사이를 어슬렁거리는 팀버울프나 독수리를 길들여보기도 했다. 간간히 땅바닥에 떨어져있는 마법시약들을 줍는 재미도 있었다.
처음에는 마냥 빗나가기만 하던 화살이 이제 좀 제대로 들어맞는 감이 오기 시작하자 나는 길들인 팀버울프와 독수리와 함께 지나가는 흑곰을 잡아보기로 했다.
흑곰은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주위를 신중하게 살펴보다가 곰이 저만치 사정권 안에 있을 때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보기좋게 곰의 옆구리에 가서 박혔고 곰은 울부짖으며 내쪽을 쳐다봤다. 나는 두 번째 화살을 날리면서 팀버울프와 독수리에게 공격을 명령했다. 그런데 독수리는 날아가서 곰의 등을 쪼아댔지만, 팀버울프는 그저 내 뒤만을 지키며 서있을 뿐이었다.
나는 화살을 날리면서 공격명령을 계속 내렸지만, 팀버울프는 그저 명령을 무시하면서 내 뒤만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곰은 무서운 속도로 내게 덤볐다. 나는 화살 쏘랴, 공격명령 내리랴 바쁘고 분주한 가운데서 곰의 앞발에 어깨와 가슴을 얻어맞았다. 엄청난 고통을 느끼면서 나는 다급하게 화살을 날렸지만 코앞에 있는 곰에게 화살은 그다지 커다란 타격을 주진 못했다. 나는 손과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느끼며 뒤로 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발자국 못가서 곰의 앞발이 내 등을 후려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나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눈앞이 새까매졌고 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눈앞이 환해지자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난 회색빛 로브를 입고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게다가 세상은 온통 회색빛이었고 내 발밑에는 쓰러져있는 내 시체가 보였다.
-죽었구나, 나는!!!!!!!
곰은 내 시체를 잠시 툭툭 치더니 어슬렁거리며 어디론가 걸어갔고 곰을 공격하던 독수리는 내가 죽자 잠시 곰 등에 앉아있더니 어디론가 날아가버렸다. 내 뒤만 졸졸 쫓아오던 팀버울프는 잠시 곰과 내 시체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역시 어디론가 가버렸다.
잠시동안 갈피를 못잡던 나는 일단 살아나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살아나야하는지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일단 다시 도시로 가보자.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뭔가 수가 나겠지. 제발 돌아올 때까지 그대로 있어줘, 내 소중한 짐들아!
나는 북서쪽을 가늠하고 뛰기 시작했다. 얼마나 가야할지 잘 몰랐고 거리도 가늠되지 않았으며 막막하기만 했다. 뭣보다도 누군가가 내 시체에서 짐들을 집어갈까바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누군가를 찾아서 열심히 뛰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를 뛰었을까... 갑자기 숲 한가운데서 죽어버린 내 몸이 딱 굳어버렸다. 동시에 머리 위에서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되살아나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나는 앞 뒤 가리지를 않았다. 어쨌든 나는 일단 살고 봐야했고 그래서 '네!'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온통 회색빛이던 세상이 화악 걷히며 색깔을 입었고 내 머리를 무겁게 짓누르던 회색로브의 후드가 벗겨졌다.
-살아난건가?
갑자기 새로운 삶을 얻자 잠시 어리둥해진 내 눈 앞에 허름한 로브를 입은 남자가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뒤로 돌아 어슬렁거리며 걸어갔다.
-아... 원더링 힐러!
숲을 떠돌아 다니는 부활자들. 나는 유의 숲속에서 그들을 자주 봤었지만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도대체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었다. 그들은 말을 걸어봐도 상대를 안했으며 가끔씩 숲을 어슬렁거리는 몽뱃이 먼발치에서 보이면 호들갑스럽게 가드를 불러댔다. 나는 그때만해도 내 손으로 만든 엉터리 활로 몽뱃 한두마리쯤은 잡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매우 허접하게 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내 생각은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다.
나는 그 묵묵히 자기 일만을 하는 '놀라운' 힐러의 뒷모습에 대고 '고마워요'를 되뇌었다. 그리고는 유령인 채로 달려왔던 길을 다시 되짚어 달려가기 시작했다.
5.
저만치로 희부연 돌벽이 보였다.
팍팍한 다리를 끌고 처적거리며 걷던 나는 그제야 다시 힘이 슬슬 솟는 것을 느꼈다.
-모두 나를 따라와!
호기있게 소리를 쳤지만 내 뒤를 따르는 것은 대여섯시간 전에 숲에서 길들인 팀버울프 졸리 뿐이었다.
명예로운 전사들의 도시 트린식.
르네상스 이전, 트린식은 수많은 전사들이 모여드는 곳이라고 했었지만 지금 트라멜의 트린식은 황량하기 그지 없었다. 길거리엔 주인없는 개와 할버드를 든 가드들만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브리튼에서 본 무수한 모험가들과 전사들과 마법사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트린식을 찾은 이유는 단 한가지, 나에게 앞으로 전사로서의 길을 제시해줄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였다. 단지 이미 내 손에 활이 쥐어져 있다는 이유로 아쳐로서의 길을 마치 무슨 숙명처럼 걷기시작했다고는 하지만, 내 스스로도 활 하나만을 가지고 전사-모험가로서의 삶을 살기엔 뭔가 모자란 감이 있었다.
여관에 들러서 잠시 여독을 푼 나는 명예로운 무기점을 찾아갔다. 상점주인은 내게 여러 가지 무기를 늘어놓고 보여주었다. 칼 종류, 메이스 종류, 폴암 종류, 도끼 종류.... 난 롱소드와 메이스, 할버드와 워엑스를 앞에 놓고 한참을 궁리했다.
-졸리. 넌 뭐가 좋을 거 같니?
팀버울프는 내 발치에 웅크리고 앉아 나를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망치를 들고 노우즈헬름을 뒤집어써서 좀 우스운 형상을 한 상점주인은 나에게 날렵하게 생긴 한날 도를 보여줬다.
-이게 요새 전사들 사이에서 제일인기가 높은 카타나이죠. 초보전사인듯한데 이걸 먼저 쓰는게 어떨까요? 가장 쉽게 다룰 수 있는 무기죠. 가볍기도 하고.
카타나는 한손으로 쓸 수 있게 된 가볍고 날렵한 칼이었다. 나는 카타나를 들고 이리저리 휘둘러봤다.
-괜찮네요. 가볍고.... 하지만 전 두손으로 쓸 수 있는 무기가 더 나을 듯 한데요.
-그렇다면 할버드는 어떤가요? 다루기는 좀 힘들고 무겁지만 파워는 최고지요.
주인은 할버드를 들고 크게 휘둘러보였다. 부웅하는 소리가 머리위에서 위협적으로 들려왔고 웅크리고있던 졸리가 크게 짖어댔다. 주인은 잠깐동안 할버드를 어떻게 다루는지 내게 보여줬고 나는 금방 그 거대한 무기에 매료되고 말았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할버드를 머리 위에서 한바퀴 돌리더니 자루 끝을 바닥에 쿵 찧으면서 세웠다. 나는 박수를 쳤고 졸리는 크게 짖어댔다.
-좋아요! 멋지군요! 얼마죠?
나는 할버드를 사들고 상점을 나왔다. 상점 주인은 전사들을 위한 훈련장을 알으켜줬고 나는 그곳에서 더미를 치며 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한 반나절 정도 할버드를 휘둘러 더미를 쳐대다보니 슬슬 할버드가 손에 익어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고 거기에 자신감을 얻은 나는 이곳 트린식을 시작점으로 하는 명예로운 전사의 수련여행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우선 트린식 남쪽게이트를 출발점으로 하기로 했다.
일단 로얄뱅크에서 남은 돈을 다 뽑아들고 마굿간을 찾았다. 두명의 동물 조련사가 마굿간 바닥의 말똥을 치우고 있다가 나를 쳐다봤다.
말은 의외로 비쌌다. 나는 한참 모자라는 GP를 주머니 안에서 만지작거리면서 두 조련사를 애처롭게 쳐다봤다. 조련사들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내 발밑에 앉아있는 졸리를 내려다봤다. 조련사들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들은 팀버울프같은 동물은 사주질 않는다고 했다.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한숨을 푹 쉬고 돌아나오려는데 한 조련사가 나를 불러세웠다.
-저기,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닌데....
-네?
-원한다면 동물조련기술을 가르쳐줄 수는 있어요. 그 기술로 야생마들을 길들여 타고다닐 수는 있죠. 어떤가요?
-얼만데요?
동물조련 기술을 배우는 데에는 말 한 마리를 사는 것보다 훨씬 적은 액수의 돈이 필요했고 그정도의 돈은 충분히 있었다.
-좋아요!
나는 동물조련에 필요한 지식을 배우는데 남은 돈을 다 써버리고 말았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뭐라드라, 물고기를 주는 대신 물고기 낚는 법을 가르쳐준다는 말이 이런 때 해당되는 것일까.....
나는 트린식 남쪽 게이트 다리 앞에 서있었다.
내 옆에는 나의 듬직한 친구 팀버울프 졸리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고 내 왼손에는 얼마 전에 새로 깎은 활이, 배낭 안에는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수량의 화살과 충분한 새고기가, 그리고 등에는 좀 전에 산 할버드가 매달려있었다.
-자, 졸리! 지금 이 순간 브리타니아엔 블루에스라는 아쳐-스워드 전사가 탄생한 거야! 그리고 너는 그 위대해질 전사의 충직한 친구이고! 나는 브리타니아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수행을 할 거야! 브리튼 제일은행에서 봤던 무수한 전사들과 모험가들처럼 말이야! 가자, 졸리! 전사의 명예를 위해!!!!!
나는 다리 위로 발을 내딛었다.
브리타니아에 새롭게 한명의 허접한 아쳐-전사가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난 정의의 도시 유Yew에서 평범한 나무꾼 아버지와 평범한 활장이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의 숲은 넓었고 난 그 넓은 숲을 뛰어다니며 숲의 동물들과 친하게 지내며 자라났다. 어린 나에게 매일 뛰어노는 유의 숲은 세상의 전부였고, 난 이곳이 내가 태어나고 자라다가 결국은 늙은 몸을 누일 곳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때문에 거무튀튀한 피부를 가진 오빠 블루어리츠blueritze가 부모님과 싸우고 집을 나가면서 나에게 던진 말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오빠는 아버지를 닮아 몸이 건장했고 어머니를 닮아 손재주가 매우 뛰어났었다. 부모님은 오빠에게 나무꾼과 활장이라는 가업을 물려줄 생각이었을테지만 오빠는 부모님의 기대에 그대로 따르기엔 너무나도 아는 것이 많았다.
빵 몇조각을 배낭에 담아 둘러메고 집을 나서며 문 밖에서 안을 엿듣던 나에게 오빠는 이렇게 말했었다.
-북서쪽으로 가봐라. 거긴 더 넓은 세상이 있을 거야. 그리고 그곳이 진짜 세상이지.
앰패스 애비의 포도주가 유난히도 맛있었던 그해, 포도주에 거나하게 취해서 집으로 돌아오던 아버지는 몽뱃 두 마리에게 죽음을 당했고 상심한 어머니는 집안에 틀어박혀 버렸다. 그리고 난 아버지와 어머니를 대신해서 나무를 하고 활을 만들어 파는 일을 떠맡게 되었다.
넓은 숲에서 한가로이 나무를 패고 활을 깎아서 배낭에 담고 하는 일들을 반복하다보면 어느새 시간관념이 희박해지고 덩달아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까지도 모르게 되곤 했다. 시간과 공간의 혼동이 내 의식을 덮쳐버릴 때는 난 아무런 미련 없이 나무껍질로 불쏘시개를 만들어 불을 피우고 그대로 침낭 속으로 기어들어가 잠을 청했다. 어차피 돌아가봐야 폐인이 다 되어버린 어머니만이 있는 집이라면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이제는 찾아오는 사람들도 없고 간간히 양털을 모으러 오는 외지인들만 빼면 쇠락해질대로 쇠락해진 이 유란 도시처럼 도시의 상징인 정의 또한 쇠락해져버렸고 그저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만 남아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날 어머니는 유 묘지에서 스켈레톤들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나는 특별히 공을 들여서 만든 활과 화살 몇 개를 들고 묘지로 달려갔다. 부모님들이 다 돌아가신 슬픔 때문도 아니었고 더이상 의지하거나 부양해야할 가족이 남아있지 않은 데 대한 상실감도 아니었다. 그저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인가하는 가능성에 대한 막연한 기대였다.
들고간 화살을 다 써버리도록 스켈레톤 두 마리를 간신히 잡은 나는 나의 보잘것 없음과 약간은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으로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두운 집구석에서 한참을 울어댄 나는 집안에 남은 활들을 모두 싸들고 나와 집에 불을 질러버렸다.
이제는 이 넓은 유의 숲을 다시 보고싶지 않다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도록 강요하면서 난 들고나온 활을 모두 팔아 약간의 돈을 마련했고 그돈으로 난생 처음 입어볼 갑옷을 샀다.
여행준비를 다 마친 나는 북서쪽을 바라봤다. 그러나 어쩐지 그곳으로 가면 가족과 나를 아주 간단히 버린 오빠를 만나게 될 것만 같았다.
나는 남동쪽으로 길을 잡았다. 유의 묘지를 급히 지나면서 마지막으로 흩어지는 어머니의 유골-이곳에선 사람의 시체가 매우 빨리도 썩어버린다..-을 흘끗 보고선, 나는 이 나라의 수도라는 브리튼을 향해 발을 재촉했다.
2.
사실 나에겐 브리튼으로 가서 무엇을 하겠다하는 별다른 뾰족한 수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유 촌구석에서 태어나 세상물정 아무것도 모르고 살다보니 그저 있을 거 다 있고 없는 거 없는 대도시에 한번 가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기왕에 것, 어찌어찌 잘 돼서 유명한 모험가나 마법사의 수하로 들어가 나도 근사한 모험가나 마법사가 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지만, 물론 어디까지나 기대일 뿐이었다.
유에서 브리튼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가끔 길에서 토끼나 개를 만나면 길들여서 데리고도 다녔고 새를 잡아서 깃털을 뽑아 새구이를 해먹기도 했다.
이따금 말이나 커다란 새-나중에 그 이름을 알게 된 오스타드를 탄 모험가들이 급히 내 앞쪽을 또는 뒤쪽을 향해 달려가기도 했지만 난 감히 그들의 이름조차도 물어볼 엄두를 못내었다. 스켈레톤 하나도 버겁게 잡는 내게 그들은 무척이나 거대한 존재였고 거기에 비해 나는 그저 초라한 촌뜨기일 뿐이었다.
어쨌든 나는 길에서 한발짝이라도 멀어지면 금방 괴물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저 앞쪽에 뭔가 낯선 것이 건들거리면서 길을 막고 있었다. 나는 계속 걸어가면서 그것이 무엇인가 주시했다. 점차 그것과의 거리가 짧아지자 나는 그것이 흉측스럽게도 머리통이 없는 괴물-헤들리스란 것을 알았다.
괴물은 어디서 내는지도 모를 괴성을 지르며 내게 달려들었고 나는 황급히 내손으로 만든 것 중 제일 괜찮은 활에 화살을 매겼다.
팅~! 화살은 공기를 가르고 날아갔지만 괴물의 몸 근처에도 닿지 않았고 나는 허둥대면서 다시 화살을 날렸다.
하지만 간신히 날린 두 발째 화살은 괴물의 몸 가까이 떨어졌을 뿐이었고 다음 화살을 찾는 순간 괴물의 주먹이 내 머리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나는 혼비백산해서 주저앉았고 덕분에 괴물의 일격을 피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괴물의 주먹질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나는 정신없이 괴물을 밀쳐내고 일어나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어그적거리면서 걷는 괴물은 나보다 느렸다. 조금 뛰자 숨이 가빠왔고 거리가 충분히 벌어졌다싶어 나는 길가에 서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그때, 오른쪽의 숲에서 뭔가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며 숲의 그늘에 시선을 꽂았다. 불안한 맘으로 숲을 바라보는 그 잠깐 동안 머리속에서는 '달려! 달려! 도망쳐!'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댔지만 난 꼼짝할 수도 없었다.
잠시후 수풀을 가르며 날카롭게 울어대는 하피가 나타나 나에게 다가왔고 그 순간 내 뒤로 어그적거리는 헤들리스의 걸음소리가 둔탁하게 울려왔다.
사실, 그 위기를 어떻게 넘겼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무턱대고 앞만 보면서 뛰었고 뛰다가 힘이 들면 가방에서 빵을 꺼내 씹었고 그렇게 배가 터지도록 빵을 씹어대면서 뛰다가 갑자기 앞에 나타난 돌로 쌓은 타워를 발견했고 무턱대고 뛰어들어가보니 갑옷에 할버드를 든 전사 둘이 있었지만 그들은 나를 도와주지 않았고 타워 2층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 숨바꼭질을 한바탕 하고난 담에 타워를 뛰쳐나갔고 그리고도 계속 앞만 보고 뛰다가 더이상은 못뛰어, 차라리 죽고말겠다하고 체념하면서 그냥 땅바닥에 쓰러져버리고도 몇 분이 지나서야 난 내가 그 두 괴물을 따돌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땅바닥에 엎어진채로 한참을 지나자 해가 졌고 주위가 어둑어둑해진 다음에야 나는 갑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일어났다.
-갑옷이 부끄러운 줄 알아라, 블루에스....
어느새 주위는 매우 어두워져 있었고 내게는 횃불 하나 없었다.
나는 길가에 서있는 나무껍질을 긁어 불쏘시개를 만들었고 길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모닥불을 피웠다.
가방 속에서 새고기를 꺼내 불에 구우면서 나는 내가 과연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인가를 따져봤다. 그냥 유의 고향에서 나무를 패고 활을 깎아 만들면 어느 정도 나 혼자 살만한 수준은 될 것이야. 아니 잘하면 브리타니아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는 활장이가 될 수도 있지. 이건 어머니도 이루지 못한 것이라구. 차근차근히 올라가면 언젠간 최고의 활장이가 될 수도 있어. 자, 기회는 아직도 있어. 다시 유로 돌아가서 활장이일을 하는 거야. 그것은 편하고 안정돼있는 좋은 직업이야. 아, 물론 지루하긴 하지. 지루하긴 하다구.........
나는 침낭을 뒤집어쓰고 부드럽게 깔린 풀 위로 누웠다. 누운 채로 나는 한참동안 멀뚱멀뚱 하늘을 바라봤다.
-그래, 그냥 계속 가던 길을 가는 거야. 난 그저 펼쳐져있는 위로 바보처럼 살아가진 않겠어. 내가 앞으로 무엇이 될지 나 스스로조차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무언가가 되고 말거야. 아버지나 어머니처럼 바보같이 살다가 그렇게 가지는 않을 거라구.
검은 하늘 위로 브리타니아의 두 달 트라멜과 펠루카가 사이좋게 떠올랐고 모닥불이 피시시하는 소리를 내면서 꺼져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