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라는 매체가 문학과 조우하게 되면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특히 문학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작품이 아니라-을 영화가 다루게 되면 그가 창조한 문학작품이 영화 속의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하게 된다. 단적인 예로 <세익스피어 인 러브>가 그러하다.
이러한 과정은 그 자체로 참 매력적이지 아닐 수 없는데, 그 매력이 어느 정도냐면 나 역시 포우에 빠진 나머지 <애나벨 리>라는 허접한 이야기를 쓸 정도라고나 할까....
그러다보니 국내에선 몇몇 매니아 층에서만 유명하지만 해외에선 거의 절대적인 세계관을 창조해낸(물론 그 혼자가 아니라 지인들과의 [어쩌다보니] 공동작업이 된 거긴 하지만) 하워드 필립 러브크래프트란 인물과 그가 자기 자신의 소설 속에서 언급하기 시작해 나중엔 실존한다는 착각마저 일으키게 된 [악마서] <네크로노미콘>을 가져와 영화로 만드는 작업은 언젠간 이루어졌을만한 사건일테다.
영화는 실존인물 러브크래프트가 미국의 한 종교단체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금서 <네크로노미콘>의 존재사실을 알고 그곳에 잠입해 실물 <네크로노미콘>을 필사하다가 결국엔 훔쳐갖고 나온다는 플롯을 바탕으로 세 편의 영화가 액자처럼 끼워져 있다. 물론 이 세 편의 단편들에서 <네크로노미콘>은 중요한 아이템으로 기능한다.
재밌는 것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각 단편들의 브리지 역할을 하는 러브크래프트의 시점은 그가 생존해있던 1933년으로 설정돼있지만, 3편의 단편들은 영화제작년도인 1994년 또는 7,80년대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말하자면 러브크래프트는 <네크로노미콘>을 통해 미래를 봤다고나 할까. 물론 현재 <네크로노미콘>을 둘러싼 몇몇 뜨거운 현상들-지구상엔 실제로 <네크로노미콘>이란 책이 몇개의 판본으로 존재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것들은 모두 고대신화를 적당히 뜯어고쳐서 그럴싸하게 지어낸 가짜들이다. 러브크래프트와 그의 친구들은 생전에 <네크로노미콘>을 작품 속에서 언급하거나 짤막하게 인용만 했을 뿐 결코 그 제목으로 책을 쓴 적이 없다.-을 보건대 그가 전혀 미래를 예측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뭐 사실여부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각 단편들은 세명의 감독이 나누어 연출했는데, 이 감독들의 면면이 또 참 재미있다.
먼저 세번째 에피소드 <Whispers>와 러브크래프트가 등장하는 베이스 스토리인 <The Library>는 러브크래프트의 열혈추종자 브라이언 유즈나가 맡았다. 그가 스튜어트 고든과 함께 만든 <좀비오> 시리즈가 러브크래프트의 원작을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뭐 열혈 러브크래프트 추종자들은 그 둘이 러브크래프트의 원작을 훼손했다고 아낌없는 욕설을 날려주지만) 그리고 바늘이 가면 실이 따르는 법. 살아있을 때 무척이나 그 외모가 기괴했다는 러브크래프트역에는 유즈나-고든 커플의 페르소나 제프리 콤즈가 맡아 멀쩡한 외모를 보여준다.(참고로 러브크래프트가 탄 택시 기사역으로 브라이언 유즈나가 몸소 나서주셨다^^)
모 교단의 도서관(아무래도 크툴루의 추종자들이 아닐지..)
러브크래프트와 사서(??)
문제의 책, 네크로노미콘
<크라잉 프리맨>, <늑대의 후예들>로 유명한 프랑스 감독 크리스토퍼 강스가 연출한 첫번째 에피소드<The Drowned>는 중간에 포우의 아우라가 강렬한 플래시 백이 또다른 액자로 삽입돼있는데, 포우의 되살아난 시체 모티브와 크툴루의 촉수주둥이(여기선 문어발이었지만 뭐..)가 적절히 아우러져, 시대를 앞서간 두 천재에게 미친듯이 경애를 날려대는 것을 볼 수 있다.
주연을 맡은 브루스 페인은 웨슬리 스나입스의 <페신저 57>에서 인상적인 악역을 선보인 적이 있는데, 그의 차가운 무표정이 절망으로 일그러지는 모습은 아주 보기 좋았다.
에피소드의 마지막은 화려한 액션으로 장식되어 감독의 이후 행보를 짐작할 수 있기도 하다.
오래된 삼촌의 저택을 유산으로 받은 델라포어
삼촌의 유언장.... 자살한 삼촌은 유언장에 뭔가 불길한 이야기를 써놨다.
사랑하는 아들과 아내를 잃은 삼촌
늘상 이렇듯이 여기서 한번 신을 저주해주신다. 그럴거면 애시당초 왜 믿는건데?
(바다에서 갓 올라온 듯한)정체불명의 생명체
그놈이 놓고간 네크로노미콘
결국 삼촌은 해서는 안될 짓을 하고 만다. 너무나도 친숙한 오망성.
그리고 되살아난 아들.....
과 아내... 헉!
절대 산낙지를 통채로 머리부터 잡아먹는 장면이 아니다.
삼촌의 유언장을 보고 저도 해보려는 델라포어
결국 차사고로 잃은 아내를 되살리는데 성공하지만....
뭐 처음에는 좋았겠지...
하지만...
...... 뭐... 인생 별 거 없다.
언제 봐도 느끼한 저 눈빛.
짝퉁 크툴루스러운 보스 괴물.
두번째 에피소드 <The Cold>는 이후 새로운 <가메라> 시리즈(평성 가메라 시리즈라고 하던가..)를 연출한 슈스케 가네코가 연출을 맡았다. 상당히 가벼운 미스테리 구조를 띄고 있는데 결국은 일그러진 불로불사에 대한 탐닉과 그 반복을 그리고 있다.
셋방있음.
의문의 실종사건을 파헤치던 기자.
커피를마시며 집주인의 딸이라는 여자를 인터뷰하는데....
사건의 발단인 여자의 엄마 에밀리. 플룻을 배우기 위해 도시로 상경했다.
사실 알고보면 폭력적인 계부로부터 도망친 것. 저딴 새낀 아주 개새끼다.
에밀리를 구해준 매든 박사
매든 박사는 희귀병을 앓고 있어 매일 저렇게 얼음찜질을 해야된단다.
역시... 매든 박사 또한 네크로노미콘을 갖고 있었다.
네크로노미콘을 연구, 생명을 연장시키는 약을 만든 매든 박사.
아.. 결국 원조교제...-_-
원조교제를 목격하고 열받은 하숙집 주인아줌마 리나.
그리고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에밀리와 불에 노출돼 녹아가는 매든 박사.
절규하는 에밀리 뒤에서 에밀리를 노리는 리나.
매든 박사의 최후....
수십년동안 아기는 태어나지 않았다....
마지막 에피소드 <Whispers>는 그나마 전체 에피소드 가운데 제일 맘에 드는 에피소드로, 전형적인 도시괴담과 환상, 그리고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속에서 튀어나왔음직한 크리쳐가 어울려 가장 끔찍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물론 이야기 자체는 러브크래프트스럽다기 보단 상당히 클라이브 바커스럽지만.
도살자라고 불리우는 도시의 지하에 사는 살인마와 그 살인마를 사주하는 초월적인 존재들, 그리고 자기 앞에 놓인 난관을 스스로의 힘으로 뚫고 나가는 용맹무쌍한 여인의 임신에 대한 불안감 등이 일관된 스타일로 펼쳐진다. 물론 지하의 [괴물]에 감염돼 문드러지다가 부서지는 폴의 형상과 사지절단되는 사라의 모습은 브라이언 유즈나라는 이름을 두고 본다면 다소 평이할 수도 있지만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환상으로 치환시키는 연출력은 나름대로 빼어나다.
용의자를 쫓는 두 경잘, 사라와 폴. 둘은 알고보면 CC.
사고로 의식을 잃은 폴이 끌려간 자국을 쫓는 사라.(운전할 땐 안전띠 필수)
어느 건물의 지하로 들어간다. 슬슬 전형적인 도시괴담의 꼴을 잡아간다.
완전 다이하드.
갑자기 나타난 웬 노인.
그리고 샷건을 쏴대는 장님 할머니.
이 둘은 서로 말하는 내용이 엇갈리고 사라는 이 둘 가운데 용의자인 도살자가 있다고 생각한다.(하지만 어딜 봐서?)
사라의 협박에 도살자의 소굴로 안내하는 해럴드.
도시의 지하에는 알 수 없는 고대문명의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도살자의 흔적.
헤럴드를 다그치는 사라.
신을 믿지 않는다며 사라를 구덩이 속으로 밀어넣는 데이지.
구덩이 밑은 뭐......
"난 임신했단 말야!!!" 절규하는 사라.(웬지 남 일 같지가 않군..-_-)
이미 뇌를 파먹힌 폴.
폴의 뇌는 어떤 생명체 속에 흡수돼있었다.
사라의 환상.
그 환상과 현실의 접점.
<네크로노미콘>은 사실 이전에 샘 레이미의 데뷔작 <이블 데드>에서도 언급된 바가 있다.
산장에 놀러간 애쉬 일행이 지하실에서 찾아낸 [죽음의 책]이 바로 이 <네크로노미콘>으로 설정돼 있던 것.
그밖에 크툴루 신화와 네크로노미콘을 차용한 영화는 무수히 많으니 자세한 정보는 http://www.weirdtales.org/ 나 http://www.mystery.pe.kr/에서 찾아보시길.
*치명적인 오류를 고쳤음. IMDB만 믿었더니 에피소드 순서가 완전 뒤죽박죽 돼버려서 한참 헤매다가 간신히 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