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의 여름은 정말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더웠다. 어느 정도였냐면 발바닥에 밟히는 아스팔트가 녹아서 군화 워커 밑창에 끈적하게 들러붙을 정도였다고 할까. 그 더운 여름에 매일같이 두꺼운 군복과 군화를 몸에 칭칭 두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저주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도 한가지 다행인 점은 내가 배속 받았던 '오일분석실'은 1년 365일 항상 일정한 습도와 온도를 유지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여름에는 에어컨을, 겨울에는 히터를 항상 모자람없이 틀어댈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오일분석실이란 데는 비행을 마치고 갓 내려온 비행기의 엔진 오일을 받아서 커다란 장비를 이용해 성분분석을 하고 그 분석결과를 가지고 엔진의 이상유무를 판단하는 곳이었다. 1억원이 훨씬 넘는 장비에 오일을 집어넣어 돌리는 것은 나를 비롯한 유상병과 최병장의 몫이었고 분석결과를 가지고 이상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오일분석실 반장인 김원사의 일이었다.
군대란 곳이 늘 그렇듯 편한 보직을 받은 졸병은 항상 고참들의 갈굼 대상이었다. 완전 무골호인인 최병장은 제대를 두 달 앞두고 있었고 다음 달이면 병장으로 진급할 유상병은 원래 활주로까지 나가 전투기에서 엔진을 떼었다 붙였다하는 고된 일을 하던 지원반에 있다가 손목을 삐어 오일분석실로 오게 된 경우라서 자대배치를 받자마자 편한 오일분석실로 배속된 나를 항상 못마땅했다. 그는 상병 5호봉이 되자 원래는 그의 몫인 오일분석실 청소와 뒷정리 등을 새까만 이등병인 나에게 몰아주었다.
아직 내무반 분위기도 다 파악 못한 졸병에게 작업장 일을 맡겨버린다고 몇몇 고참들이 못마땅해 했지만 나로서도 갑갑한 내무반 보다는 그편이 나았고 게다가 선임자가 별로 없어 기관중대에선 꽤나 고참인 무골호인 최병장이 선선히 승낙해버려 나는 얼렁뚱땅 이등병 말호봉 때부터 작업장을 전담하게 됐다. 덕분에 나는 아침 점호가 끝난 뒤에 늘상 있는 집합 대신 일찌감치 내무반을 나서 도중에 식당에 들러 아침밥을 먹고 서둘러 내려가 오일분석실을 청소하고 히터를 틀고 중대본부에 가서 비행시간을 적어오는 따위의 일만 하면 됐다.
물론 그런 식의 편안함은 곧바로 양날의 검이 되어 내게로 돌아왔다. 이병들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들인 일병이나 상병들은 툭하면 내게 시비를 걸었고 주말만 되면 내무반에 앉아있는 꼴을 못봐줘 수시로 나를 뺑뺑이 돌려댔다. 일병 계급장을 달고나서 한 달 가량이 되었을 때 나는 이제는 진급한 유병장에게 넌지시 아침에 내무반 청소를 해야되기 때문에 오일분석실 청소를 못하겠다고 말을 건 적이 있었다. 그때 유병장은 "그럼 병장인 내가 청소하리?"하며 내 머리를 사정없이 쥐어박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졸병 때부터 편한 보직을 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완전한 동네북이 되어버렸다.
계절이 바뀌고 끔찍하게 무더운 여름이 되었어도 고참들의 갈굼은 멈추질 않았다.
나는 여전히 아침마다 일찍 내려가 오일분석실 청소를 했고 혹시라도 야간비행이 있는 날이면 유병장 대신 분석실에 남아 있다가 내무반 청소와 점호가 끝나면 올라오곤 했다.
오일분석실의 일이라는 게 전투기가 떴다가 내리고서 길어야 한 시간 안쪽에 대략 3,4분 동안 처리하면 되는 것이라 나는 늘 유병장의 눈치를 보며 빈둥거릴 수 있었다. 제대하면 복학하기 전에 최소한 자격증 세 개는 따놓겠다는 유병장은 기계설계기사 기출문제집을 들여다 보며 내게 빈 시간 동안 공부나 해두라는 호의를 보이기도 했다.
오일분석실은 활주로 옆에 넓게 자리한 야전정비대대 가운데 기관정비중대 행거의 한쪽 구석에 있었다.
한여름이 되어도 에어컨의 힘으로 23도 가량을 유지하고 있는 오일분석실의 문을 열고 나서면 금방 기름냄새 섞인 뜨거운 공기가 폐로 밀려 들어왔다.
"활주로가 얼마나 뜨겁냐면 말야, 하사관들은 식당까지 밥먹으러 가기 귀찮으니깐 활주로에 계란후라이를 부쳐서 점심으로 먹는단 말야."
가득찬 폐오일을 커다란 드럼통에 버리고 있을 때 유병장은 마침 엔진을 끌고 들어오는 지원반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팬텀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F-4 전투기는 그 덩치만큼이나 엔진이 커서 1톤 트럭보더 더 커보이는 달리 위에 실은 엔진을 행거 안으로 끌고 들어올 때는 대여섯 명이 달라붙어서 밀어야 했다. 유병장은 일병 때 저 엔진을 실은 달리를 뒤에서 밀다가 미끄러져 넘어져 손목을 삐었다나.
"제공호 엔진은 혼자서도 끈다는데, 씨발."
유병장은 담배꽁초를 탁탁 털고 분석실로 들어갔다.
한여름의 공군기지는 야간출격이 잦았다. 보통 저녁 8시경까지 비행을 하고 내려오는데 그런 날이면 9시나 돼서야 내무반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오일은 활주로에서 비행을 마치고 내려온 전투기의 엔진에서 바로 뽑아서 바로 분석실로 오도록 돼있지만 거리가 멀고 왔다갔다할 인원과 차편이 바로 준비가 안돼있기 때문에 보통 한 시간 정도는 기다리곤 했다.
그런 경우와는 달리 한밤중에 비행을 하는 전투기가 있는데 모든 전투기는 반드시 착륙 후 오일검사를 하도록 돼있기 때문에 아무리 늦은 시간이래도 내무반으로 비행연락이 오면 잠을 자다가도 일어나 오일분석실까지 내려가야 했다.
그날도 그런 경우였다.
막 내무반 청소를 하려고 세면실에서 걸레를 빨고 있는데 내무반 방송으로 당직병의 목소리가 들렸다.
걸레를 쥐어짜고 당직사관실 앞으로 갔더니 마침 유병장이 터덜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당직병인 최병장이 말했다.
"야, 유병장! 야간 있다고 쏘프하러 내려오란다!"
웃통을 벗어제껴 깡마른 상체를 드러낸 유병장이 내쪽을 쳐다보더니 심드렁하게 말했다.
"야, 보고하고 갔다와라."
청소열외, 점호열외. 일병한테는 좋은 일이지만 병장한테는 옷 도로 차려입고 1킬로미터가 넘는 행거까지 갔다오기는 귀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일병에게는 고참들의 갈굼이 있었다.
"야 유병장. 니가 갔다오지? 일병이 뭘 아냐?"
"얘도 알 건 다 압니다. 뭐하냐? 가서 옷 갈아입지 않고."
나는 걸레를 든 채 병장들을 제외한 졸병들의 선임인 임상병에게 달려갔다. 임상병은 나를 지긋이 내려다봤다. 원래 찢어진 도끼눈이 더 심하게 찢어졌다.
"쌔끼, 또 열외가?"
나는 우물쭈물할 수밖에 없었다. 키가 무척 큰 임상병의 손이 내 뒤통수로 날아들었다.
"알았다, 씨팔!"
휘청거리는 나를 놔두고 임상병은 가버렸다.
옷을 갈아입고 중대 행정병에게 행거 열쇠를 받은 뒤 당직사관에게 작업보고를 하고 내무반을 나섰다. 한여름의 열대와는 상관없이 땀이 흘렀다.
터덜거리며 가로등도 없는 언덕길을 내려갔다. 사병식당을 지나고 BX를 지나 차길을 건너서 필드로 들어가는 게이트를 지나는데 게이트 앞에서 보초를 서는 헌병이 나를 지긋이 쳐다봤다. 게이트 앞의 초소에 켜둔 불빛이 게이트 근처에 몇 개 있는 가로등과 함께 주위를 괴괴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곳부터 행거까지는 활주로 주위에 켜둔 불 외에는 불빛이 하나도 없었다.
어둑한 속에 거대한 어둠으로 서있는 기체정비중대 행거를 지나 기관정비중대 행거에 도착했다. 주먹만한 자물통을 열고 행거 안으로 들어서니 완벽한 어둠이 나를 맞았다.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출입문 옆에 있을 전등 스위치를 찾았고 스위치를 올리자 커다란 소리와 함께 행거 꼭대기에 달린 전등의 한 줄에 불이 들어왔다. 그러자 가운데 통로를 기준으로 양 옆에 혹은 횡대로 혹은 종대로 늘어서 있는 거대한 엔진들이 보였고 통로 한쪽에는 내일 아침에 나갈 거라는 엔진 한 대가 달리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 엔진들 사이를 걸어 오일분석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몇시간 동안 갇혀있어 무더운 공기가 힘겹게 출렁였다. 나는 전등불을 켜고 에어컨을 켠 뒤 장비의 전원을 올렸다. 에어컨과 분석장비의 소음으로 공기가 진동했다. 부연 형광등 불빛을 받으며 나는 의자에 앉아 일과중에는 늘상 켜두는 라디오를 켰다. 그러고나서 생각해보니 언제 비행 들어가서 언제 착륙하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보통 비행은 한 시간을 넘기지 않으니 늦어도 두 시간 안에는 오일이 들어오겠지. 시계를 올려다봤다. 10시가 막 되려고 하고 있었다. 지금쯤 점호를 하고 있을테고, 자정까지는 끝내고 올라가서 잘 수 있겠지.
나는 맘 편히 있기로 했다. 군화를 벗고 슬리퍼로 갈아신은 뒤 상의를 벗고 에어컨 앞에서 땀을 식혔다. 라디오에서는 디제이와 게스트가 낄낄거리며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몸이 어느 정도 식자 나는 의자에 앉아 내무반 한쪽에 마련된 책장에서 집어다 놓은 무협지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이따금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무협지를 읽다가 문득문득 시계를 보면 더디게 흐르는 시간이 고만큼씩 뛰어넘어가 있었다. 지루한 무협지를 덮고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11시가 되려면 아직 10분 가량 남아있었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잠깐 서성거리다가 김원사의 책상 위에 놓인 재떨이를 봤다. 원래 오일분석실에서는 흡연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중대 내에서 가장 시원한 이곳엔 점심식사를 마친 상사니 원사니 준위들이 모여서 잡담을 하며 담배를 피워댔기 때문에 항상 재떨이가 마련돼 있었다. 나는 벗어서 의자 등받이에 걸쳐놓은 상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고 창문을 살짝 열었다. 후끈한 한여름밤의 대기가 울컥하며 밀려들었지만 곧 차가운 실내 공기와 섞여버렸다. 창문 옆에 서서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난 나는 한 번 더 실내를 서성거리다가 의자에 앉아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모든 전투기의 정비 일정은 정비타워라고 불리는 곳에서 주관하고 있었고 당연히 전투기의 이착륙 여부도 정비타워에서는 모두 알고 있었다. 나는 이전에 야근을 하다가 유병장이 정비타워에 전화를 걸어 전투기의 착륙여부를 묻는 걸 본 적이 있었다.
"타워 이중삽니다, 통신보안."
"아, 필승! 소프실 이일병입니다, 통신보안. 저기 오늘 야간비행 내려왔습니까?"
"쏘프실? 아니 오늘 야간 없는데?"
어라, 이건 뭔가 아니다 싶은 생각이 스쳤다.
"어... 오늘 야간 없습니까? 내무반에서 연락받고 내려왔는데요...."
"아니, 오늘 야간 없다."
느긋한 경상도 사투리.
"알았습니다, 필승."
수화기를 내려놨다. 어떻게 된 거지? 당직병인 최병장은 오늘 야간비행이 있다고 내려가서 작업하고 오라고 했고 당직사관 역시 아무 말 없이 보내주었다. 그런데 정비타워에서는 오늘 야간비행이 없다고 한다.
에어컨이 실내 온도를 23도로 맞춰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땀이 흘렀다.
일단 내무반으로 전화를 걸어서 확인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화기에 손을 올려놓자 갑자기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렸다. 나는 화들짝 놀랐지만 급하기 마음을 가다듬었다. 혹시 정비타워에서 잘못 알았다고 전화한 건 아닐까? 그래서 지금 오일을 보낸다고 하는 건 아닐까? 수화기를 들었다.
"야 이 새끼야, 뭐해! 빨리 튀어 나와!"
그리고 엄청나게 큰 잡음.
나는 수화기를 내던지고 의자를 넘어트리며 한쪽 벽까지 후다닥 물러났다. 책상 위에서 늘어져 대롱대롱 매달린 수화기에선 계속 시끄러운 잡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등쪽에서 서늘한 한기가 흘렀다.
"아, 씨팔, 뭐야!"
한 마디라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으면 못견딜 거 같았다. 나는 더듬거리며 책상 쪽으로 다가가 우선 수화기를 들어 재빨리 전화기 위에 던지듯 올려놓고 의자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주위를, 형광등 불빛이 밝히고 있는 8평 남짓한 실내를 둘러봤다. 둘러보던 내 눈이 창문에 걸렸다. 아까 담배를 피우고 안 닫아놨던가? 10센티미터 가량 빼곡이 열린 창문 밖으로 완벽한 어둠이 내다보였다. 거기에 뭔가가 있었다. 아니,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몸을 날릴 듯이 움직여 창문을 닫았고 걸쇠를 걸었다. 이제는 공포가 주위를 서서히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황급히 에어컨을 끄고 장비의 전원을 내리고 대충 군화를 꿰어신은 다음 상의를 들고 문쪽으로 다가갔다.
"분명히 타워에선 야간 없다고 했다고. 난 갈 거야."
일부러 쥐어짜듯 목소리를 냈지만 그 목소리는 상당히 낯설었다.
나는 불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 에어컨 바람으로 식어있던 몸에 뜨거운 공기가 끈적하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오일분석실의 문을 잠그고 부연 불빛을 받고 있는 행거 안을 서둘러 걸었다. 줄줄이 늘어서 있는 엔진들은 전등빛을 받지 않는 곳에 시커먼 그림자를 만들어놓고 있었다. 나는 그 그림자 속에서 뭔가가 튀어나오는 상상을 억지로 억누르며 뛰듯이 걸었고 스위치 있는 곳에 도착했다.
스위치를 내리면 이제 행거 안은 완벽한 어둠에 휩싸일 터였다. 나는 열어놓은 출입문 쪽을 봤고 불을 끄자마자 뛰어가도 되도록 출입문까지의 경로 안에 장애물들이 없음을 확인했다.
스위치를 내렸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눈 앞이 아찔해졌다. 내 손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나는 달렸다. 군화 밑창이 페인트를 발라놓은 시멘트 바닥 위를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 소리는 한둘이 아니었다. 갑자기 수많은 군화발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고, 뭔가에 걸려 넘어졌다. 머리속에서 뭔가 하얀 것이 터졌다. 한바퀴 나뒹군 나는 벌떡 일어섰지만 출입문으로 향하는 방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주위는 여전한 어둠이었고 군화발 소리는 계속 울려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더욱 시커먼 뭔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게 뭔지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머리속이 점점 새까맣게 물들어 갔다. 미칠 것만 같은 기분으로 시커먼 존재들을 무시하려 애를 쓰며 주위를 둘러보던 내 눈에 희미하게 출입문의 윤곽이 들어왔다. 생각하기도 전에 내 몸은 소리를 지르며 그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군화발 소리와 시커먼 것들이 내 몸을 뒤에서 옆에서 잡아채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달렸다. 그리고 문턱에 발목이 걸리며 나는 행거 밖으로 나뒹굴었다.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벌떡 일어나 출입문을 닫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자물통에 열쇠를 꽂아 열고 걸쇠에 걸고 다시 채웠다. 그리고 주춤주춤 뒷걸음질로 출입문에서 물러났다.
사방은 고요했다. 너무 고요해서 근처 풀숲에서 들리던 벌레들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한쪽 군화가 벗겨져있는 걸 알아차렸다.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도 군화는 행거에서 저만치 떨어진 곳에 아무렇게나 떨어져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그제야 오른쪽 발목이 지독하게 아픈 것을 알았다.
공포는 한결 가라앉았지만 그래도 돌아오는 길의 어둠은 여전히 무서웠다. 하지만 아픈 발목 때문에 빨리 걷지를 못했다. 절룩거리며 겨우 게이트 근처의 밝은 빛 속으로 들어오자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게이트의 초소를 지키는 헌벙은 안 보였다. 초소 옆을 지나는데 초소 안에서 전화통화를 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즐거워하고 있었다. 나직하게 씨팔을 되뇌었다.
절룩거리며 내무반으로 들어서니 창으로 내쪽을 빼곡이 내다보던 당직병 최병장이 놀라며 소리질렀다.
"야! 너 어떻게 된거야?"
그는 후다닥 뛰쳐나와 나를 당직사관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반쯤 간이침대에 누워 당직하사와 농담을 하던 당직사관 역시 하얗게 질린 얼굴이 되어 나를 쳐다봤다. 난 당직사관실 벽에 걸린 거울로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얼굴을 여기저기 피가 묻어 있었고 상의는 앞 단추를 채우지 않은 채 군데군데 찢겨져 있었다.
나는 세 사람 앞에서 더듬더듬 오일분석실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당직사관이 최병장을 노려봤다.
"야, 진짜 쏘프 있다고 했어?"
"타워 이중사라고 연락 왔었다니깐요?"
최병장은 억울한 얼굴이 됐고 당직사관은 직접 정비타워에 전화를 걸었다.
"야, 이일병. 일단 씻고 와라."
전화를 끊은 당직사관은 나에게 말했고 나는 절룩거리며 세면실로 들어갔다.
그날 나는 당직사관의 차를 타고 의무대로 달려가 당직을 서던 의무병에게 치료를 받았다. 발목은 심하게 부었지만 뼈가 다치진 않았다고 했고 얼굴은 왼쪽 턱 근처에 다섯 바늘 정도를 꿰매야 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당직사관은 물었다.
"야, 니가 아까 한 말 사실이야?"
"사실입니다."
잠깐 침묵하던 당직사관은 다시 말했다.
"나 여기 14년 동안 있으면서 귀신소동 같은 건 한 번도 없었거든? 니가 너무 무서워서 헛것을 보고 들은 거야."
"그럼 쏘프 있다고 한 것도 헛것입니까?"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말았다.
"아무튼 니가 잘못해서 넘어져서 다친 거니깐 너무 상심하지 말고, 들어가서 푹 자라. 담부턴 조심하고."
"네... 알았습니다...."
다음날 나는 유병장을 비롯한 고참들에게 어제의 일을 시시콜콜이 얘기해야 했고 행거에 내려와서는 중대장의 호출을 받아 중대장과 중대감독관, 주임원사에게 또 같은 얘기를 반복해야 했다. 중대장과 주임원사는 낄낄거리며 내 머리를 두들겼고 감독관은 또라이 어쩌고하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94년의 여름은 지나갔다. 그 뒤로 야간비행이 몇 번 있었지만 모두 중대 전체가 야근하던 중이었고 제대할 때까지 한 번도 혼자 밤에 행거로 내려갈 일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그때의 일에 대한 기억은 나로 하여금 의도적으로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은 이제 헛수고가 돼버렸다.
지금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이 어둠은...
넌 너 자신이 바보같다고 느꼈을 거야. 나에게도 넌 바보처럼 보였으니까.
내가 네 편지를 받고 얼마나 웃어대었는지 몰라. 어떻게 해서 그런 바보같은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네 이야기를 간단하게 한 마디로 정리해보고 싶어. 가능하다면 말이지.
넌 너무나도 일상에 파묻혀 있었던 거야. 뭐 순전히 널 위로하기 위한 말이긴 하지만, 아마 내가 너처럼 그렇게 오래 똑같은 생활의 연속 속에 있었다면, 나도 그랬을 지 몰라. 너에게 한마디 충고하자면, 좀 쉬어. 한 보름 가량 휴가를 받아가지고 어디 여기저기 여행을 좀 다녀보면 아마 괜찮아질 거야. 동해안을 걸어서 포항에서 속초까지 가보는 것도 괜찮을 거야. 아니면 지리산을 다 돌아다녀 보거나. 하지만 길을 잃지는 말아. 실종신고라도 들어가면 안되니까. 그런데 좀 하나 걸리는 것이 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초자연적인 현상 같은 것은 믿지 않는 편이야. 여럿이 같이 있는 자리에서 다 같이 유령을 보았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다른 식으로 이해하려 할 거야. 뭐 지극히 합리적이니 과학적이니 하는 방식으로 말이지. 그런데 네가 겪었던 일 중에서 그 일만은 네가 직접 경험한 것인지, 아니면 네 의식 속에서 인위적으로 혹은 일종의 안전장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해. 사람의 심리라는 것은 커다란 충격을 받을 때를 대비해서 충격완화장치 같은 것을 항상 준비하고 있으니까.
네가 지하철을 기다리고 서있었던 그 역의 플랫폼에서 봤다는 군상(群像), 그것은 아마 낯선 것을 더이상 낯설게만 보이게 하지 않으려는 심리의 반증이었을 거야. 네 주위 배경을 네가 느낀 엄청난 낯설음 속의 공포와 연결함으로써 네가 느낄 공포의 이중성을 미리 차단해버린 거지. 만약 네가 평범함과 낯설음이라는 것들이 공존하는 속에 혼자 있게 된다면 아마 네가 받는 충격은 더 컸을 지도 몰라. 그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지.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정확할 듯 하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지고 있어. 내 말대로 한 며칠 휴가 받아서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와. 아니, 꼭 여행이 아니더라도 넌 네가 속해있는 일상을 한 번쯤은 탈피할 필요가 있어. 네 일상이 너무 큰 짐이 되어서 너를 압박한 거야. 그러니까 이 친구의 충고를 무시하진 말아.
건강하고, 나중에 서로 멀쩡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길...
추신) 한번 말했지만, 그렇다고 영영 사라지진 말아. 난 수사기관 같은 데 불려다니는 거 딱 질색이니까.
그러나 그는 사라졌다. 어느날 저녁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난 그 사실을 알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종로경찰서 형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가기 싫은 서울을 다시 올라가야 했다.
형사들은 내게 틀에 박힌 질문들을 늘어놓았다. 나는 성심껏 그들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러나 그들이 내가 그에게 보낸 답장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 같았으므로 나 역시 그것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다섯 시간여 동안 나를 잡아둔 그들은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나를 풀어주었다.
한겨울의 종로거리는 매우 추웠다. 나는 경찰서 앞에서 그의 집이 있는 인사동쪽을 가늠해봤다. 하지만 금방 그의 빈 집에 들어선다는 게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나는 영풍문고에서 책 몇 권을 산 뒤 서울역에서 하행선 표를 끊었다. 대합실에 앉아서 책들을 훑어보고 있던 나는 문득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대합실엔 사람이 많았다. 나는 갑자기 더 추워지는 것을 느꼈고 외투자락을 여몄다.
객차 안은 한산한 편이었고, 내 옆자리는 비어있었다. 하지만 영등포역에서 40대쯤으로 보이는 비쩍 마른 남자가 내 옆자리를 차지했다. 책에 몰두하고 있던 나는 차가 멈춘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풍겨온 시큼한 냄새가 너무나도 느닷없어서 주위를 살펴봤고, 그 남자를 봤다. 남자는 나를 흘끗 쳐다보고는 곧바로 의자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나는 다시 책으로 주위를 돌렸고, 남자는 곧 코를 골기 시작했다.
3시간 남짓 기차를 타고 가면서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중년남자의 코고는 소리를 듣는다는 건 생각보다 더 질긴 인내심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나는 잠자는 남자의 무릎을 주의하며 20분마다 객차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워댔다.
5개비째 담배를 피우고 객차로 들어온 나는 시큼한 냄새가 더 강하게 풍기는 것을 알았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내 자리를 찾아가면서 주위 사람들을 둘러봤다. 아무도 이 시큼한 냄새를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내 자리까지 온 나는 자리로 들어가려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 옆에 앉아서 코를 골던 중년남자는 어디로 갔는지 없었고 대신 '그'가 내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미안."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시선에서는 복잡하고 정신없는 빛의 스펙트럼이 펼쳐지면서 내 눈을 찌르기 시작했고 귀속으로는 그가 남긴 마지막 음절이 끝도 없이 맴돌기 시작했으며 내가 딛고 있던 객차 바닥은 서서히 뭉글거렸고 나는 휘청거리다가 그만 뒤로 넘어져 뒤통수를 바닥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끔찍한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나는 침대칸에서 정신을 차렸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젊은 승무원은 내가 갑자기 객차통로에 쓰러져 마구 뒹굴며 소리를 질렀다고 말해줬다. 나는 진정제를 맞은 상태였고 마침 그 객차에 있었다던 의사가 옆에 서있다가 나를 잠깐 진찰해보더니 목적지에 도착하면 바로 가까운 병원을 찾아가보라고 충고해줬다. 그러면서 의사는 나에게 간질을 앓은 경력이 있냐고 물어봤다.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내 옆자리에 앉아있었던 비쩍 마른 40대 남자를 떠올렸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사실은 그 자리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 남자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건 없건 간에 나는 '그'가 나를 똑바로 올려다봤던 그 공간에 다시 들어서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단지 확인만 해보고 싶었고, 그래서 짐을 찾아오겠다며 그 젊은 승무원과 같이 내 좌석을 찾아갔다.
객차를 하나 하나 건너가며 내가 탔던 객차에 가까워지자 나는 슬슬 몸이 심하게 떨려오기 시작했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침대칸으로 되돌아가 승무원이 갖다줄 내 짐을 기다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메웠다. 그러나 나는 간신히 그 두려움을 눌렀고 승무원의 뒤를 따라서 내가 탔던 객차로 들어섰다.
더 이상 시큼한 냄새는 나지 않았고 내 옆자리에 앉아서 코를 골던 중년남자도 없었다. 나는 선반에서 내 가방을 내리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그 중년남자에 대해 물어보는 바보같은 짓은 절대 하지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선 나는 무사히 대천역에 내렸지만 의사의 충고대로 병원을 찾아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는 바로 주차장으로 가서 내 차를 찾았고 시동이 걸리지 않아 한참 동안 고생을 하다가 겨우 자정이 다 돼서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튿날부터는 무척 바빠서 그의 실종에 대해 더 이상 깊게 생각할만한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사흘 뒤 저녁, 우편함에는 귀퉁이가 해지고 군데군데 흙까지 묻은 편지봉투 하나가 꽂혀있었고 그의 이름이 발신자 위치에 정신없이 휘갈겨있었다. 나는 당장 그 편지봉투를 뜯어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쇼파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놨고 저녁을 차려먹고 목욕을 하고 책을 보는 동안 편지봉투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 편지봉투를 뜯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읽던 책을 다 읽고 쇼파에 드러누워 재미없는 텔레비젼 프로에 서서히 질려갈 즈음이었다. 나는 잠깐 편지봉투를 들고 휘갈긴 그의 이름을 쳐다보다가 봉투를 뜯었다. 편지봉투는 아무렇게나 찢어졌다.
길게는 쓰지 못하겠군. 일단 네가 싫어하는 서울까지 발걸음하게 만들어서 무척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내 처지를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어쨌든,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친구로서의 네 충고를 완전히 무시해버린 것도 미안하군. 너한테는 이래저래 못할 짓만 하게 됐으니....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반반이야. 이곳은 끔찍하고 잔혹하지만 그럭저럭 견뎌나가고 있어. 후회하지도 않을테지만 후회할 수도 없는 일이지. 이제 너하고는 영영 작별이로군. 10년이 넘게 잘도 버텨온 우리의 우정이란 것에도 경의를 표해야겠어. 우정이란 게 있다는 전제하에서지만.
건강하고... 부디 그들을 조심하길.....
"좋아. 이것부터 말할게. 그 애는 소아마비 환자였어.
4살 무렵에 앓았었지. 5살 무렵엔 그 애 엄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이것도 얘기해야겠군. 그 애의 아빠말야.
70년대에 있었던 조직 사건 가운데 하나의 조직도를 보면 그 애 아빠의 이름 석 자가 들어있었지. 좋게 말하자면 그 애 아빠는 70년대에 사회주의 이상을 가지고 싸웠던 '투사'였어."
"지금은?"
"그 애 아빠와 그 애 엄마가 결혼하고 나서부터는 모든 게 최악이었어. 집안의 반대와 생활고는 뭐 당시 좌파 활동가들에게는 익숙한 거였겠지만 말야.
그래도 그 애 아빠와 엄마는, 뭐랄까, 지나치리만치 순진하게 '사람에 대한 희망'이니 '신념'이니 하는 것들에 목을 매는 경향이 강했지. 난 지금도 그런 것들을 별로 신용하고 있진 않지만 말야."
"멜로드라마식으로 말하자면 '축복받지 못한 사랑'이란 거 말이지?"
"응. 뭐 실상은 멜로드라마처럼 짜안하지도 않았겠지만.
어쨌든 그 애는 어릴 적부터 불행하게 자랐어. 비록 아는 거 많고 따스한 가슴을 가졌다는 아빠의 품에서 자라났지만, 왜, 대개들 아빠하면 가정의 근본적인 생활력을 책임지는 위치로 생각들 하잖아? 하지만 그 애 아빤 그렇질 못했지.
아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작은 잡지같이 이런저런 데에 기고하는 원고료와 간간히 나가는 공사장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그 애 집안의 소득 전부였으니깐."
"너무 전형적이란 생각, 들지 않아?"
"비극이란 게 원래 그래. 게다가 그 애의 경우에는 갈 데까지 다 가버린 비극이랄 수 있고."
"비극이라.... 하지만 잘만 했으면 그런대로 따스한 가정이 될 수도 있었겠는데 말야."
"응. 근데 그 따스한 가정이 되는 길을 막는 게 두 가지 있었어.
하나는 그 애가 절름발이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그 애의 아버지가 지나친 이상주의자였다는 거였지.
혹시 엄마 없이 아빠 밑에서만 자란 여자아이가 초경 때 느끼는 감정 아니?"
"글세... 뭐라고 딱 잘라 말하긴 힘들지만 얼풋 알 거 같기도 하고....."
"그 애는 중학교 2학년 때 초경을 겪었어. 자기 친구들-이래봤자 같은 반 아이들이 전부였지만-이 그럴 때 어떻게 대처해야하는 지를 잘 알고 있을 때 그 애는 반 아이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그것도 체육시간에 일을 겪은 거야."
"끔찍했겠군."
"물론. 그 애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양호실로 옮겨졌어.
그것만 보자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들지도 모르겠지. 그렇지?"
"그 애는 아이들이 모여있는 교실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고 결국 교사들은 그 애를 조퇴시켜서 집에 보냈지."
"잠깐, 50명이 넘는 반 아이들 가운데에서 그 애에게 호감을 갖고있는 애들이 하나도 없었단 말야?"
"없었어. 하나도. 그리고 그건 당연한 거였어.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아닌 일이고."
"살벌하군."
"살벌하지. 그리고 그 살벌함을 직접 피부로 느끼면 공포가 될 수도 있어. 서서히 심장을 옭죄어오는 공포.
당연한 얘기지만, 그 애는 다음날부터 학교를 가지 않았어. 그냥 방에 틀어박혀있었지. 그 애 아빠는 아는 것이 많았지만, 당장 생리대 하나 없는 딸아이한테 무얼 어떻게 해줘야할 지는 알지 못했어."
"그 애 아빠, 친구라도 있었을 거 아냐. 여자친구나 그 애 엄마의 친구라도."
"있었지, 물론. 하지만 그 애 아빠는 자존심이 굉장히 센 사람이었거든."
"자존심? 당장 딸에게 닥친 문제를 자존심 때문에 해결하지 못한다니 말이 돼?"
"말이 될 수밖에. 그 애 아빠에게 있어서 '동지'들은 다 어디론가 잠적했거나 철창신세가 됐고, 밖에 '살아남아 있는 자'들은 그 애 아빠에게 있어선 '변절자'들이었거든. 그 애 아빠는 정말로 궁지에 몰렸을 때 변절자와 자살 가운데 하날 택하라면 주저없이 자살을 택할 그런 위인이었어."
"너무하네 정말."
"그 애 아빠에겐 최선도, 최악도 없었던 거야. 그냥 눈 앞에 떨어진 어찌하지 못할 현실밖엔 없었지.
그럭저럭 며칠이 지나 그 애가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나 절룩거리며 피묻은 속옷들을 빨고 자기 손으로 밥을 차려먹는 것을 그 애 아빠는 안타깝게 바라보고만 있었어."
"딴에는 가슴이 아팠겠지."
"그랬을 수도. 한없는 무기력과 대인기피란 틀 속에 갇혀버린 딸이 다시 생명력을 갖길 바랬을 거야.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딸애는 집밖으로 한발짝도 나가려하지 않았어. 그뿐 아니라 아빠하고 얼굴을 마주 대하려 하지도 않았고. 그 애 아빠는 그 애를 이런 식으로 더 놔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 애에게 뭐라고 해줄 말도 없었지."
"학교 선생은?"
"안왔어. 집에 전화도 없는데다가 집이 있는 곳도 말하자면 빈촌이니깐 설사 왔다 하드래도 동네를 뱅뱅 헤매다가 돌아갔을 거야."
"그 애 아빠는 학교에 연락도 하지 않고?"
"그 애 아빠에게 있어선 학교선생들이란 존재보다도 아빠라는 자신의 존재에 무게를 더 크게 둔 거겠지. 그 애가 집에 칩거한 지 보름이 다 되어갈 무렵 그 애 아빠는 공사장에서 번 돈으로 원피스 한 벌을 들고 집에 들어왔어."
"옷으로 딸애 맘을 풀어줄 생각이었겠군."
"그래. 하지만 그전에 그 애 아빠는 술을 먹는 실수를 하고 말았어. 공사장에선 흔한 일이지만 그 애 아빠는 결코 해서는 안될 짓을 하고 만거야."
"왜?"
"아빠라는 존재를 술과 자식과 함께 방에 가두면 안되는 이유지.
그 애 아빠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는 그 애에게 옷이 든 쇼핑백을 건넸어. 그리고 그것이 부녀간의 대화의 발단이 되리라 믿었지."
"근데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군."
"그 애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꼼짝하지 않았어. 다른 때 같으면 딸애가 스스로 마음을 열고 나오기를 기다렸겠지만, 그날은 그렇질 않았지. 술 때문에 증폭된 감정이 쏟아지고 말았던 거야.
그 애 아빠는 한참동안 그 애를 달래다가 결국 벌떡 일어나며 내뱉듯이 말했어. 정 그럴 거라면 차라리 죽어버려라, 난 네가 세상의 희망이 되길 원했는데 그러지 못한다면 넌 살아있을 가치가 없다."
"너무하는군. 아빠 맞어?"
"그 애 아빠가 다시 그 애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앉아 감정을 추스리지 못하며 담배를 피워 무는데 그 애가 이불을 박차고 벌떡 일어났지. 그리고 절룩거리며 빠르게 부엌으로 나갔어. 그 애 아빠가 그냥 담배를 물고 있는 그 잠깐 사이에 그 애는 부엌에서 부엌칼로 자신의 목을 찌르고 만 거야."
"맙소사!"
"그 애 아빠는 순간 그 애가 부엌에서 무얼 하는지 직감했어. 그리고 황급히 일어나려다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지.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그 애가 방문간에 서서 아빠를 쳐다보며 서있었던 거야."
"......."
"그 애는 그 자세 그대로 죽어버렸어. 손에 칼을 쥐고 목에서 피를 흘리면서 꼿꼿하게 선 채로.
그 애 아빠는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창문을 깨고 밖으로 뛰쳐나갔지. 창문이래봤자 조그마한 들창이었지만 그 들창을 부수고 비집고 나간 거야. 그리고는 사라져버렸어."
"그 애는?"
"그 애는 며칠 뒤에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주민 신고를 받고 온 경찰들이 썩어가는 시체를 발견했지. 자살로 처리됐고 그 애 아빠는 실종처리됐는데 몇 달 뒤에 근처 개천에서 그 애 아빠로 추정되는 중년남자의 시체가 발견됐어. 그걸로 끝이야."
"그걸로 끝이야?"
"응. 뭐 더 알고싶은 거 없어?"
"있지. 하지만 뭘 더 말해달라고 해야할 지 잘 모르겠군. 어쨌든 그 애에 대해서 되도록 많은 것을 알고 싶었은데 말야.
그리고 그렇게 끝나버린다는 것은 너무......."
"너무?"
"글쎄, 뭐라고 말은 못하겠는데...."
"좋아. 그럼 이 얘기도 해주지. 그 애의 계속되는 이야기야."
"계속되는?"
"그래. 그 애의 아빠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그 애에게 내뱉듯 말하고 난 뒤의 일이지.
그 애는 자살을 하지 않았어."
"그럼?"
"복수심이라고 해야할까, 증오라고 해야할까, 아무튼 그런 게 그 애의 감정을 자극한 거야. 그 애 아빠의 과격한 발언이 잠들어있는 그 애의 신경을 깨운 거지.
그 애는 더 이상 학교를 나가지 않았고 나중에 자퇴서를 냈지만 자신만의 방법으로 공부를 시작한 거야."
"검정고시?"
"아니. 음악.
그 애의 엄마는 음악에 재능이 많았어. 악기를 잘 다뤘고 노래도 썩 잘했지. 그 애 아빠는 완벽한 음치였지만.
그 애는 엄마의 유품인 통기타를 만지작거리면서 책을 사다가 혼자 공부하기 시작했어. 학교에서 배우는 그런 쓸데없는 음악지식이 아닌,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뽑아내는 공부였지."
"흐음..."
"뭐 더 이상 길게 얘기할 것도 없겠지만, 그 애 아빠는 그 애가 그런식으로 자기만의 세상과 소통하는 것을 가만 내버려뒀고 그 애는 미성년 딱지를 떼자마자 기타를 메고 여기저기 싸돌아다니기 시작했어."
"그 애의 폐쇄성은? 음악을 하기 위해선 그 단점을 극복해야 했을텐데?"
"그 애는 결코 먼저 나설 필요는 없었지. 그 당시만 해도 여자애가 기타를 메고 대학로를 돌아다닌다는 것은 꽤 눈길을 끌만한 일이었으니까.
어찌어찌해서 그 애는 운좋게 작은 호프숍에 픽업됐고 거기서부터 그 애의 음악인생은 시작된거야."
"잘 됐어?"
"잘 됐지, 물론. 모든 해피엔딩이 다 그렇듯이."
바람은 흙맛이다.
시커먼 하늘에서 불어내려오는 바람은 짓다만 건물의 콘크리트 외벽을 긁고 내려오며 갈래갈래 찢어지고 그 가운데 한 가닥이 열린 내 입으로 들어온다.
사그락거리는 작은 흙가루들이 혀 위를 구른다. 아래턱을 끌어올리자 어금니 사이로 더욱 잘게 부서지는 흙가루들이 느껴진다. 흙가루들은 매마른 목구멍을 타고 육체의 한가운데로 추락해 내려간다.
입을 닫아도 여전히 바람은 흙맛이다.
빗방울 하나가 뺨 위로 떨어진다.
시커먼 하늘에서 바람을 타고 내려오는 빗방울이 보인다.
빗방울은 그 춤추는 듯한 떨림을 알아채기도 전에 눈앞에 나타난다.
나는 눈을 감는다.
아침은 끔찍했다.
어제의 기억은 도무지 어디서 끊어진 가닥을 이어 붙여야 될 지도 모를 정도로 토막나버려 있었다.
나는 함께 누워있던 그 벌거벗은 몸뚱이가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침대에서 살그머니 일어나 숨을 죽이며 옷을 찾아 꿰입어야 했다. 욕지기가 치밀었고, 화장실의 소음이 그 여자를 깨울까봐 두려워 목구멍을 애써 틀어막으며 방을 나설 수 있었다.
모텔이라는 이름을 가진 시내의 그 숙박업소의 복도는 퀘퀘했고 또 조용했다. 운동화의 고무밑창이 바닥과 만나는 소리가 복도를 떠돌았다. 나는 그 작은 소리마저 여자를 깨울까봐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perfect day.
사람이 없는 빈 카운터에 이 노래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나는 카운터 앞 바닥에 침을 뱉고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도 모텔은 어제 그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나는 서둘러 회사로 향했다. 카운터 옆을 지나며 본 시계는 이미 10시를 한참 지난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고 휴대전화는 배터리가 다 닳았는지 꺼져있었으며 아마도 오래된 전화카드가 한 장 정도 남아있을 지도 모르는 지갑은 빌어먹게도 그 여자가 자빠져있는 모텔 방 안에 있을 터이기 때문에 오늘 지각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한 그 자식에게 책 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덜 늦어야 될 판이었다.
예상대로 그 자식은 날 보자마자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나는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의자를 끌어앉으며 조그만 목소리로 죄송합니다,를 되뇌었지만, 조금 뒤 메신저로 날아온 점심먹고 잠깐 보자는 그 자식의 나에 대한 용건은 가볍게 넘어가지 않을 위협이 담겨 있었다.
내가 날려먹은 두 시간 가량의 시간을 어떻게든 만회해 보려는 내 노력은 여기서부터 허사가 됐다. 거기다가 제대로 씻지를 못해 텁텁한 입안과 근질거리는 얼굴조차 내가 해야 할 단순입력작업을 방해하고 있었다.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아 화장실로 달려가 대충 입안을 헹군 다음 세수를 하고 고개를 들자 거울에 그 자식의 얼굴이 나타났다.
"뭐냐?"
그 자식은 씹다가 뱉듯이 말했다.
"뭐냐고. 넌 뭐냐는 말이다."
이 상황에서 '나는 나'라는 식의 대꾸를 날릴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저 입을 닥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말이 말같지 않냐? 너 뭐냐고!"
그 자식의 머리칼은 짧게 쳐져 온통 삐죽삐죽 서있었고 그 아래 이마에는 자잘한 여드름이 대여섯개 골고루 흩어져 자리잡고 있었다. 숱이 적은 눈썹은 가늘기까지 했으며 어울리지 않는 동그란 눈은, 그 인상과는 너무나도 안 어울리게 생겨서 쳐다볼 수록 웃음을 터트리고 싶게 생겼다. 납작한 코와 툭 튀어나온 광대뼈에는 거뭇한 모공이 너무나도 눈에 잘 뜨였고 별 특징없이 생긴 입술이 빠른 아래턱 위에 약간 일그러져 있었다.
"왜요."
나도 모르게 이 말이 튀어나왔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나와버린 말이었다. 잠깐 사이 이 말을 만회해볼까하는 생각을 했지만 관두기로 했다.
"왜요?"
예상했던 대로 말꼬리가 심하게 쳐올라가는 대답이 돌아왔다.
"너 지금 나랑 장난치자는 거냐? 왜요?"
그 자식은 거울로 시선을 옮겨 헛웃음을 흘렸다.
"왜요? 아, 씨발새끼...."
그래, 결국 이런 상황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더 이상 생각하기를 관두기로 했다. 조금 전부터 머리가 아파왔으며 내 지각으로 인해 팀 분위기가 어떻게 되든지도 신경쓰기 싫어졌으므로.
"됐어요."
이 말 한 마디로 나는 모든 상황을 종료짓고 싶었다. 그래서 그 자식의 손이 날아와 화장실을 나가려는 내 셔츠를 나꿔챘을 때는 약간 기분이 상했다.
"뭐야, 씨발. 지금 뭐하자는 플레이야!"
나는 내 셔츠를 움켜잡은 그 자식의 손을 쳐 떨어트렸다.
"됐다구요!"
그리고 나는 화장실을 나섰다. 미련은 없었다. 지난 달을 포함한 남은 급여는 못받겠지만 어차피 3개월 계약으로 들어온 팀이고 이 프로젝트는 다음 다음 달까지 질질 끌테니 그때가서 지겨워져 때려치느니 지금 깔끔하게 도망쳐버리는 편이 나았다.
내 뒤로 화장실 문이 왈칵 열렸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지갑은 당연히 없고 담배도 없었으며 있는 돈이라고는 바지 주머니에 남아있는 750원이 전부였다. 나는 동전을 넣는 공중전화를 찾아 어제 만났던 사람 가운데 그나마 친근한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녀석과 점심시간에 녀석의 회사 근처에서 보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쓰렸다.
녀석의 회사까지 세 블럭을 걸어가야 했다. 아직은 공기가 서늘한 봄날이었지만 비척거리며 세 블럭을 걷다보니 관자놀이에 땀이 흘러내렸다. 녀석은 자기 회사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우리는 근처에 있는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마주보고 앉아 라면과 김밥을 시켜놓고 난 녀석에게 말했다.
"어제 기억이 안나."
심드렁하게 주위에 붙어있는 메뉴판을 보던 녀석이 말했다.
"뭐가?"
"어제, 어떻게 됐는지 기억이 안나. 아침에 어디서 일어났는지 알아?"
"길바닥?"
말해놓고선 녀석은 실실 웃었다.
"그년이랑 모텔에서 자고 있더라고."
녀석의 눈이 커졌다. 녀석은 고개를 낮추며 조용히 물었다.
"했냐?"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아. 도대체 애초에 왜 그년이 우리 자리에 왔느냐부터가 궁금해."
녀석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입맛을 다셨다.
"사실 나도 잘 몰라. 화장실 갔다와보니 걔네들이 껴있더라고. 뭐 자기 여자친구랑 같이 왔으니 껴줬겠지만 말야."
그랬겠지. 그 여자는 그렇게 은근슬쩍 나에게 접근했고, 그리고,
"아무튼 그년이 낀 다음부터 기억이 안나."
"너 보기엔 멀쩡해 보였어. 아무튼 끝나고 나갔는데 정신차려보니깐 너 없더라고. 걔는....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설마 둘이 같이 있었을 줄이야...."
할 말이 없었다.
라면과 김밥이 나왔고, 우리는 말 없이 그것들을 먹었다.
회사로 다시 들어가는 녀석에게 나는 만 원을 빌렸다.
"지갑은 찾아야되지 않겠냐? 카드나 뭐 이런 거 있지 않아?"
신용카드가 하나, 현금카드가 하나 있지만 신용카드는 막혀있고 현금카드는 상관없었다. 어차피 통장엔 잔고래봤자 몇백 원 있을테지. 하지만 녀석은 계속 말했다.
"웬만하면 지갑 찾는게 낫겠다. 아무리 그 여자애 보기 싫어도 민증 또 만드려면 돈 들어가잖아. 그리고 얘기해봐서 여기 자리 날 거 같으면 연락해주마."
나는 녀석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줬다. 어찌됐건 돈은 벌어야지.
머리가 계속 아파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지갑이 걸렸다. 편의점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사며 급속 충전기에 휴대전화를 걸어놓았다. 담배를 피우며 10분 정도 기다린 뒤에 전원을 켜보니 모르는 전화번호로 세 통의 전화가 와있었다. 나는 한참동안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고 결국 먼저 전화하기를 포기했다. 대신 어디에서 시간을 때우며 그 여자의 전화를 기다리기로 했다.
근처의 피씨방으로 들어서는데 전화기가 울었다. 발신번호는 낯이 익었다. 아마도 오전에 때려치고 나온 회사의 팀장 전화일 듯했다. 난 전화를 무시하기로 했다.
한 시간 가량 하릴 없이 게임을 하고 있자 다시 전화가 울었다. 번호를 보니 부재중으로 왔던 그 번호였다. 그 여자다 싶어서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경우를 가리키라고 준비된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멀찍이 떨어진 골목 어귀에 서서 지켜보는 모텔 앞의 풍경은 참 가관이었다. 상업지구이기 때문에 동네사람들이라고 할만한 사람이 별로 없을텐데도 어디서들 기어나왔는지 트레이닝복에 티셔츠 쪼가리 걸친 사람들이 우우 모여서 모텔 입구 쪽을 구경하고 있었고 아침에 쫓기듯 나왔던 바로 그 모텔 현관 앞에는 경광등을 번쩍이는 빽차가 두 대, 봉고차가 한 대, 그리고 요란한 구급차가 한 대 와서 여기 뭔 일이 터졌음을 소리높여 광고하고 있었으며 그 주위로 아까 나에게 전화를 걸었을 형사가 섞였을 일단의 사내들이 뭔가 바쁜척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지갑을 깨끗이 잊기로 했다. 전화번호도 알았으니 집주소 알아내는 거야 저 치들에겐 간단한 일이겠지. 한가로이 저녁 시간에 거실에 누워 텔레비젼을 보고 있을 때 갑자기 구두발로 들이닥쳐 미란다 조항인지도 안읊어주고 다짜고자 손에는 수갑을 채우고 머리에는 검은 비닐봉지를 뒤집어 씌운 채 봉고차 뒤자리에 쑤셔박혀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가......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머리가 너무 아팠고, 제대로 씻지도 못한데다 돌아다니느라 땀을 흘린 탓에 몸 여기저기가 근질거리기 시작했기에 나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시원한 쥬스를 한 컵 마시고, 이 두통이 싹 가실 때까지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지하철 역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20분 쯤 뒤, 나는 내 앞에 놓인 상황에 대해서 욕지거리를 내뱉어야만 했다.
한낮의 지하철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나는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아 몸을 웅크리듯 사리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잠시 있었지만 잠은 오지 않고 머리는 더욱 아파왔다.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그 여자를 보고 말았다.
굳이 어제밤의 끊어진 기억을 되새길 필요도 없었다. 그 여자의 라임색 가죽자켓을 본 순간 그 옷에 관련된 어제밤의 잊고 있던 상황이 머리속에서 빠르게 재생됐다. 그리고 그 얼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새까만 생머리 앞으로 비스듬하게 보이는 그 여자의 옆얼굴은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나는 아침에 모텔방에서 일어났을 때부터 피씨방에서 받은 형사의 전화, 그리고 모텔 앞에서 바글거리던 경찰들을 차례대로 떠올렸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분명히 우연하게도 심하게 닮은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그 여자의 모습은 내 눈을 계속 붙잡고 있었고, 나는 이대로 그냥 집으로 가 편하게 쉬든지 아니면 지금 저 여자가 내리려고 하는 역에서 같이 내려 도대체 이게 어떤 상황인지 알아보든지를 결정해야만 했다.
머리가 아팠다. 눈을 계속 그 여자에게 둔 채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짚고 손가락으로 세게 누르기 시작하는데 그 여자가 내 쪽을 돌아봤다. 나는 피가 얼어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 짧은 순간에 온몸에서 식은땀이 배어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열차가 역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집까지 반도 오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가 열차에서 내려 내 눈 앞을 지나가는 모습을 맞은편 유리창으로 보는 순간 나는 결정을 해버렸다.
문이 닫히기 직전 나는 황급히 승강장으로 뛰어나왔다. 열차가 출발하는 소리 사이로 여자의 구두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승강장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나는 여자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지나 않을까 걱정하며 일부러 시선을 맞은편 승강장쪽으로 준 채 천천히 여자의 뒤를 쫓았다.
미행이라는 것은 그리 재미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들키는 것과 놓치는 것 사이에서 계속 긍긍대며 여자의 뒤를 쫓았고 그 행위는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가져다 줬으며 당연히 두통은 더욱 심해졌다. 그래서 지하철역 계단을 다 올라와 시끌벅적한 차소리를 들으며, 난 여자의 행방을 찾기 전에 계단 옆 기둥에 이마를 대고 잠깐동안 치밀어오르는 욕지기를 다스려야 했다.
그 여자의 라임색 가죽자켓은 금방 눈에 띄었다. 나는 좀 더 여유있게 쫓기로 마음먹고 천천히 여자의 뒤를 따랐다.
주위는 시장이었다. 왕복 4차선 도로 양쪽으로 노점상과 납작한 건물들이 빼곡했고 사방에 소음이 가득했다. 사람들 사이로 걸어가는 그 여자를 눈으로 쫓기는 쉬웠지만 나는 곧 봄날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마저 힘에 겨워졌다.
헐떡거리며 사람들 사이를 피해 여자의 뒤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덧 한산한 주택가가 나왔다. 여자는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저 앞에서 똑바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저만치에서 가게를 발견하고는 거리를 약간 좁힌 다음 음료수를 하나 사 마셨다. 가게 앞에서 여자의 뒷모습을 주시하며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데 여자가 갑자기 옆으로 난 골목으로 사라졌다. 나는 남은 음료수를 입안에 털어넣고는 황급히 여자가 사라진 골목으로 걸어갔다.
발걸음을 꺾어 골목으로 접어드는 순간 눈앞에 뭔가가 번쩍했고 나는 곧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불쾌한 느낌을 받았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 앞을 봤다. 여자는 양손으로 핸드백 끈을 단단히 움켜쥔 채 나는 쳐다보고 있었고 그 눈은, 마치 도저히 하기 싫은 살인을 곧 해야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처럼 번쩍이고 있었다. 그런 눈을 마주 쳐다보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끔찍한 경험이었다. 등골을 타고 서늘한 느낌이 흘렀다.
"개새끼!"
여자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맨날 네 뒤를 쫓던 사람의 뒤를 쫓는 느낌이 어때? 응?"
햇볕은 이상할만큼 따사로왔지만 내 몸의 한기를 없애주기엔 모자랐다. 여자가 한걸음 다가왔다.
"네가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본 느낌은 어때? 응?"
자기가 한 말에 대한 거듭된 확인, 그 여자의 말버릇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서 나를 죽일듯이 노려보는 이 여자는 그 여자가 아니었다. 닮았지만, 아니 닮았다는 말이 무색할만큼 똑같이 생겨지만, 그 여자가 아니었다.
나는 따사로운 햇살에 어울리지 않는 한기를 느끼며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머리가 미쳐버릴 것처럼 아파왔고 뒤로 돌아 마구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분명히 죽고 말 거라는 확신도 들었다.
"....넌...."
간신히 입을 뗐지만 목소리는 목구멍에 걸려서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다시 욕지기가 치밀었다. 그 여자의 시선을 무시하고 허리를 숙여 토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갑자기 필사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나서, 어제밤부터 꼬여버린 이 시간에서 벗어나야 했다. 살아나려면 무슨 말이든 해서 이 상황을, 봄날 오후의 햇살이 내리쪼이는 이 끔찍한 상황을 깨어버려야 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죽고 싶도록 해주겠어. 죽고 싶지만, 절대 죽을 수 없도록 해주겠어."
여자의 목소리는 오히려 차분하게 들렸다. 나는 이제 울고 싶어졌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눈 앞은 검은색이다.
등을 대고 누워있으니 오히려 편안한 기분까지 든다. 계속 누워있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나는 일어나야만 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팔과 다리를 움직여 본다. 거기 있지만 사실은 거기 없는 것처럼 낯선 느낌이다.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기분은 평온하다. 계속 이대로 누워있으면 안되나 싶어진다. 하지만 일어나서 움직여야만 한다.
다시 팔다리를 움직여 본다. 여전히 움직이는 것만 같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머리를 들어 몸 아래쪽을 내려다 봐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냥 이대로 가만히 누워 편안함을 즐기고만 싶다. 그리고 갑자기 말할 수 없는 공포가 밀려온다. 도저히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 떠오른다. 머리 속이 순간 하얗게 표백되고 아우성치는 비명소리가 귀 속으로 밀려든다. 나는 눈을 뜬다. 눈을 뜨고 있었는지 감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눈을 뜬다. 여전히 눈 앞은 검은 색이다.
공포는 무척 길다. 나는 내 것인지 아닌지도 모를 숨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음악소리도 듣는다.
공포는 이제 나에게 그냥 편하게 누워있으라고 한다. 얼굴에 빗방울이 떨어지자 나는 겨우 숨을 가라앉힌다. 음악은 달콤하다. 들어본 음악이다.
perfect day, 루 리드의.
나는 이제 일어나려는 노력을 그만 둔다. 그래, 그냥 이렇게 누워만 있으면 되는 거였다.
빗방울이 얼굴을 톡톡 두드린다. 바람에 춤추는 빗방울은 눈 앞에서 잠깐 몸을 흔들다가 얼굴에 내려선다.
이제 내 몸은 서서히 가라앉는다.
하지만, 괜찮다.
괜찮을 것이다.
정말로 오늘은 재수가 없는 날이다.
스스로를 잘났다고 생각하는 인간들, 그들은 자기보다 못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까지 심하게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오늘 아침 일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동생은, ... 그 녀석은 그렇다 쳐도 어머니가 아버지나 나보다 더 잘난 것이 뭐가 있다고! 아니 나는 빼더라도 아버지보다 잘난 게 뭐가 있다고!
그 잘났다는 어머니한테 밥상머리에서 그렇게 면박을 당하시고 출근하시는 아버지께 동생 놈은 위로 한마디 해 주지 않았다. 싸가지 없는 새끼! 형한테 사사건건 대들고 무시하는 것까지는 봐줄 수 있어도 아버지한테까지 그러는 것은 참으로 두고 못 볼 일이었다.
학원을 가기 위해 가방을 챙기면서, 어머니한테 말도 안되는 잔소리를 또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이 자식 오늘 집에만 들어와봐라하고 벼르고 있었다. 네녀석은 말야, 공부를 그리 잘한다는 녀석이 말야, 그렇게 싸가지가 없어도 되는 거야? 니가 이 형을 무시하는 건 봐줄 수 있단 말야, 근데 말야, 니가 아버지한테 뭐 잘해드린 거 있다고 그 따위로 대드냐고, 응? 니가 그러고도 아버지 아들이라 할 수 있어? 누가 보면 니가 아버지 애비쯤 되는 줄 알겠다. 공부 잘하는 새끼들은 다 그러냔 말야! 눈 내리 못 깔어? 형한테 맞아볼래?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등을 타고 서늘한 기분이 자르르 흐르는 것이다. 동생한테 얻어맞고 코피까지 터진 못난 형이, 자기보다 힘도 세고 키도 크고 얼굴도 잘났고 무엇보다도 공부를 잘하고 콧대 높은 동생한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는 챙긴 가방을 앞에 놓고 방바닥에 앉아, 그날, 학교 교실에서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동생한테 면상을 보기 좋게 얻어맞고 코피가 터지던 고 3 때의 그 치욕스럽던 오후를 생각하며 가슴 속의 분을 삭이고 있었다.
"야 이 새끼야! 니 학원 안 갈래?"
어머니가 문 앞에 떡 버티고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속으론 씨팔씨팔 욕을 해대며.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분을 못 삭이고 있던 나는 문득 이런 날이 오늘 아침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생각해보니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고, 내일도 그럴 것이고... 어제도 이 시각에 여기 이 버스 정류장에서 이 생각을 했고, 그제도 그랬고, 내일도 그럴 것이고... 정말이지 이젠 질릴 때도 되었는데 이 지겨운 수레바퀴는 언제까지 돌 것인지... 짜증을 느끼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깊이 한 모금 빨아들이는데 정류장에 서있던 많은 사람들이 우루루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왼쪽으로 꺾으니 정류장으로 들어오는 버스가 보였다. 오늘도 어제와 그제와 같은 만원버스다. 내일도 마찬가지겠지.
나는 방금 피워 문 담배를 봤다. 아까웠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나는 급하게 한 모금 더 빨고는 그 긴 장초를 휙 집어던지며 사람들 틈에 섞었다. 버스가 정류장을 좀 지나 섰고 뒷문이 열리며 두어 명이 힘겹게 내리자 버스는 문을 닫고 그냥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뛰기 시작하는 사람들 틈에서 같이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에잇! 정말 재수 없는 날이군!
이웃이나 친척들은 우리 네 식구를 보면서, 나는 아버지를, 동생은 어머니를 꼭 빼어 닮았다고들 했다. 그 말들은 사실이었다. 흰머리가 이제는 관자놀이께에서부터 정수리로까지 번지는 아버지는 중소기업체의 만년 부장이고, 큰아들인 나는 무엇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는 재수생이고, 아직 흰머리 하나 없는 어머니는 좋은 입심과 탁월한 사교술로 여기저기 안 들쑤시는 데가 없이 치맛바람을 휘날리며 돌아다니고, 동생은 학교에서 무슨 놈의 써클 회장이라는 지 캡틴이라는 지 하며 자잘한 똘마니들을 거느리고 위세도 당당하게 다니는 것이, 딱 두 명씩으로 구성된 두 개의 파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 두 파에 이름을 굳이 붙인다고 하면 우성파(優性派)와 열성파(劣性派)라고나 할까?
조용하고 착하기만 한 우리 아버지의 부하인 나는, 그러나 두 우성파의 구성원들이 우리 열성파를 구박할 때면 (실제로) 잘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바락바락 대들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어머니와 동생에게 꼬투리를 안 잡히려고 노력했고 대신 그들의 자잘한 꼬투리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그러나 '흠 잡힌다'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못난 사람들만의 특권인지 번번이 꼬투리를 잡히는 것은 내쪽이었고, 어머니와 동생은 자기들의 약점은 단단히 단도리한채 일방적인 공격만 퍼부어대는 것이었다.
나는 혼자 한탄했다.
'이런 콩가루 집안이 또 어딨을까...'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우리 집안의 문제점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수입과 그 출처가 도대체 불분명한 어머니의 수입은 우리 집을 적어도 중산층 가정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만들었고, 큰아들인 나는 비록 한번 미역국을 먹었지만 우리나라 수험생들이 의례히 거치는 과정이기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고, 작은아들이야 남들이 다 인정하는 우등생이니까 서울의 일류대 진학은 문제없을 것이고, 아버지는 조용하고 인자하며 가정적이고, 어머니는 생활력이 강하고 집안살림 잘 꾸려나가니 무어 문제될 게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안으로의 부패는 더욱 번지르르해진 겉모양에 가려 드러나지 않는 것이었다. 집안에 떠다니는 묘한 공기는 내가 집에 들어가 책상 앞에 앉아 문제지를 풀 때도, TV 과외를 볼 때도 식구끼리 둘러앉아 밥을 먹을 때도, 수시로 내 숨구멍을 탁탁 막아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보는 앞에선 서로 말을 나누질 않았고 동생은 동생대로 집안식구 누구와도 말을 않고 제방에 틀어박혀 혼자 제 할 일만 했다. 간혹 어머니가 동생의 방에 들어가 무슨 얘긴가를 할 뿐.
그런 놈의 집구석이 싫어서 나는 집중도 안되는 학원 수업이 끝나자 독서실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재석과 인화와 같이 학원 옆 당구장으로 직행했다.
당구대를 잡고 각자 큐대를 나누어들고 언제나처럼 재석은 장갑과 토시를, 인화는 줄을 찾아 카운터로 간 동안 나는 골라든 큐대에 쵸크칠을 하며 빨강과 하양이 번갈아 있는 점수판을 노려봤다. 기필코 오늘은 저 잘난 체 하는 녀석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놓으리라. 그러나 그 다짐도 잠시, 호기있게 친 내 공이 두 빨간 공 사이를 맵시있게 빠져나가자 나는 두 녀석의 눈치를 살피며 빨간 고리 9개를 왼쪽으로 밀어냈다.
"어... 너 왜 80이야!"
"뭐가?"
"이 새끼 또 사기다마 친다!"
"사기다마는 무슨 사기다마."
"너 100 올린 게 언젠지 다 아는데 왜 80만 놔?"
"내가 언제 100 올렸다고 그래?"
"점번에 나랑 칠 때는 100 놓고 쳤잖아!"
"다시 내렸다, 왜!"
"아... 내비둬, 80만 치다 죽으라고..."
따지고 드는 인화보다 그런 식으로 말하며 피식대는 재석의 얼굴이 더 보기 싫다. 나는 큐대를 들고 점수판 앞에서 잠시 그러고 있었다. 내가 처신을 어떻게 해야지 잘했다는 소리를 들을까 생각하며. 그러나 아무런 대책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 둘 사이에서 나는 완전히 바보가 되어 따돌림당한다는 생각이 꼬물꼬물 밑바닥에서부터 일어나고 그러자 기분이 팍 상해버려 나는 큐대를 소리나게 내려놨다.
"씨팔... 150 놓는 니들끼리 그래 잘 해먹어라!"
아직 불을 안 붙인 담배를 입에 물고 공을 치기 위해 당구대 위에 길게 엎드린 재석이 한마디 던졌다.
"새끼... 게임비 물기 싫으니까 빼는 거 봐."
나는 가방을 들고 다시 게임을 시작하는 그들을 한동안 노려보다가 당구장을 나섰다. 개새끼들... 의리라고는 쥐뿔만치도 없는 놈들... 에라이, 그래 니들끼리 당구 많이많이 치고 잘 살아라! 계단 구석에 냅다 침을 뱉었다.
만화가게로, 전자 오락실로, 두 시간이나 이리저리 헤매며 난 가지고 있던 2000원을 다 써버렸고, 주머니 속의 학생 회수권을 만지작거리며 전자 오락실을 떠나야만 했다.
어느새 해가 떨어져 사위가 어두워져 있었다. 나는 오락실과 만화가게 위 3층에 자리잡은 당구장의 환한 불빛을 잠시 올려다보다가 발걸음을 떼었다.
야간 강의를 들으려는 고등학생들이 사방에 자욱하게 깔려있었고 친구들끼리 재잘대며 떠드는 그들의 얼굴에는 나는 절대로 재수 같은 건 하지 않겠다는 빛이 드러나 보였다. 교복을 입은 그들의 눈에 사복을 입고 전자 오락실에서 나오는 이 재수생의 몰골이 얼마나 한심스럽게 보였을까.
배가 고파왔지만 학원 앞의 포장마차에서 오뎅 국물 하나 먹을 돈이 없는 나는 터덜거리는 발걸음으로 버스 정류장을 향했다.
퇴근시간이라 그런지 정류장엔 사람이 많았다. 태반이 고등학생이었고 나와 비슷한 재수생의 몰골을 한 사람도 적잖았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들 공부를 하다가 나온 듯 피곤에 젖은 눈이나마 매섭게 빛나보였다. 왠지 그들 사이에 있는 나 자신이 무슨 죄를 지은 것 마냥 느껴져 나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쳐 상가 쇼 윈도우에 바짝 붙어 섰다. 그렇게 환한 대형 유리벽 앞에 바짝 붙어 서서 나는 정류장 여기저기에 서 있는 사람들의 뒤통수들을 가만히 노려봤다.
그 모든 사람들이 다 적으로 보였다. 내가 밀쳐 떨어뜨리고 저만치 젖혀놓고 등짝을 찍어 쓰러뜨려 그 위를 밟고 지나야할 적들. 나는 정류장에 서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한결같은 증오감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내가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내가 쓰러뜨리고 쳐부수고 뒷통수를 쳐 다시는 못 일어나도록 만들 대상으로.
나는 그렇게 의도적인 적을 만들어야만 간신히 살아야할 필요성을 느낄 수 있었다. 심각한 강박관념.
버스가 들어왔다. 사람들 몇이 버스를 따라 움직였다. 나는 주머니 속의 학생 회수권을 한 장 뜯어 손에 쥐고 버스 앞문을 쫓아 움직였다. 퇴근시간에 걸린 만원버스. 나는 아까 애써 빚어낸 증오심을 발휘하여 나의 적들을 치열하게 물리치며 버스 안으로 올랐다. 버스 운전기사 옆에 마련되어 있는 요금통에 학생 회수권을 넣고 뒤의 사람들에 밀리며 앞을 막고있는 사람들의 틈을 파고드는데 깨진 뚝배기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내 뒷덜미를 잡았다.
"이봐, 학생! 자네 고등학생 맞아?"
설마 나를 부르는 것이리랴. 나는 사람들의 틈을 파고드는 힘을 좀더 강하게 하여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인간의 벽에 구멍을 뚫고 뒤쪽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작은 희열을 느끼는 위로 깨진 뚝배기 두드리는 소리가 한 번 더 들려왔다.
"조 새끼, 조거, 재수생 같은데, 학생표 내네... 이거..."
그리고 부르릉 하며 엔진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몸을 와락 한쪽으로 몰아버리는 관성의 법칙. 어이구, 아야 하는 비명소리가 좁은 만원버스 안 여기저기에서 터져나오며 사람들의 무리가 조금 버스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러는 서슬에 조금 몸 움직이기가 편해지자 나는 머리맡에서 흔들거리는 손잡이를 잡고 발 디딜 자리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그새 완연한 밤이 도시를 덮쳐버렸다. 버스 옆으로 지나가는 차들은 모두 환한 전조등을 켜고, 길 양편으로는 형형색색의 간판과 네온사인들이 번쩍였다. 나는 두 손으로 머리 위 손잡이를 꽉 쥔 채 창 밖을 노려보듯 내다보고 있었다. 불을 밝혀놓은 버스 안의 정경이 검은 유리창에 비추어져 해골 같은 형상의 내 얼굴이 나를 노려보고 있은 것이 보였다. 나는 그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어두운 눈을 힘껏 쏘아봤다. 어쭈? 맞쏘아봐? 좋아.
버스가 환한 밤거리를 내질러 가는 동안 나는 그렇게 유리창에 비친 나 자신과의 눈싸움에 여념이 없었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내려야 할 데가 바로 다음으로 바짝 다가와 있었다.
벨을 누르고 한산해진 사람들의 숲을 비껴 뒷문 앞에 섰다. 버스가 서면서 몸이 앞으로 쏠렸다간 바로 돌아오는 사이에 뒷문이 열리고 버스가 갈라대던 공기가 흘러들었다. 어두운 밤공기. 버스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저 앞으로 달려나가고 나는 사람이 드문드문한 신호등 아래 섰다.
이렇게 또 하루가 지는구나. 고단한 재수생의 삶. 나는 길 건너편, 파란 신호만을 기다리며 선 몇 사람을 건너봤다. 그 사람 가운데 어둠 속에서도 탁 눈에 뜨이는 이쁘장한 여학생 하나. 아마도 여대생이리라. 가방을 메고 두 손으로는 파일뭉치를 들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의 삶을 파고들고 싶어졌다. 어릴 적엔 어떻게 자랐으며, 고등학교 때는 어떻게 공부를 했고, 그렇게 해서 어떻게 대학을 들어갈 수 있었고, 지금은 어떻게 대학생활을 하는지, 등등등. 내가 만약 그녀의 삶을 살았다면, 아니면 그녀가 나의 삶을 살았다면, 서로는 지금 어떠한 모습으로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을 것인가. 만약 그녀도 나와 같은 척박한 삶을 산다면, 과연 아무런 문제없이, 원만하게, 즐거운 대학 생활을 해나갈 수 있을까.
세상에 가득한 별의별 것들 사이에서 역시 그렇게 희한한 삶의 모습을 갖지는 않을까. 겉으로는 저렇게 멀쩡한 여대생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혹 속으로는 정말로 뭔가 좀 별나고 특이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닐까. 등등등.
그녀가 인도에서 도로로 내려섰다. 나는 반사적으로 발을 떼어 도로로 내렸다. 파란불이었다. 나는 그녀를 비스듬히 쳐다보며 걸었다. 그리고 거의 의도적으로 그녀의 바로 옆을 스치듯이 지나쳤다. 어두운 밤공기에 희미한 화장품 냄새가 실려왔다.
길을 다 건너 뒤를 돌아봤다. 그녀는 정류장을 지나 열심히 걸어가고 있었다. 환한 밤거리의 불빛 속으로, 그 속의 사람들 속으로. 나는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뒤를 흘끔거리며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그녀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갑자기 밀어닥치는 공허함에 몸을 떨었다. 빌어먹을...
집에 들어가기가 무진장 싫었다. 시계는 9시가 다 되어감을 알리고 있었고 나는 될 수만 있으면 외박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리 어머니의 서슬이 퍼렇고 무서울지라도. 빌어먹을 놈의 집구석.
겉으로만 평화로와 보이는 내면의 개판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더구나 그 개판에서 불행한 역만을 맡아서 하고 있는 처지에서는 더더욱.
나는 대문 앞에 서서 환하게 밝은 거실의 유리창을 노려봤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밖에까지 들려나오는 어머니의 잔소리들까지도 눈에 있는 힘껏 힘을 모아 노려봤다. 당장에 발을 돌려 이놈의 집구석에서 멀리 달아나고 싶었지만, 그러나... 나에겐 이곳 말고는 잠 잘 곳이 없었다. 잘난 친구들 누구도 이 불쌍한 영혼을 거두어 재워주고 아침을 먹여줄만큼 너그럽고 어질지 못했다. 적어도 내 친구들은 그랬다. 때문에 나는 마치 집에서 쫓겨난 애마냥 대문간을 뜨지도 못한 채 앞에서 서성거리고만 있는 밖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젠장...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한 개비 피워무는데 대문이 찰캉하며 열리더니 동생놈의 머리통이 비주룩이 밖을 내다봤다.
"형, 뭐해?"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녀석의 목소리. 갑자기 오늘 아침이 머릿속을 번개처럼 후려치고 지나갔다.
"담배 핀다."
녀석은 묘한 눈초리로 나를 흘겨보면서 대문 사이로 사라졌다. 개새끼!
허연 담배연기가 어두운 하늘 속으로 자꾸자꾸 녹아들고 있었다. 하늘은 어둡게 흐려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이놈의 세상에서 별을 본다는 것은 이미 의미를 상실하다 못해 쓰잘데기 없는 짓이 되어버렸으니까. 나는 하늘을 쳐다보며 자꾸자꾸 담배연기만 피워올렸다. 어느 집에선가 개가 짖고 있었다.
"안 들어오고 뭐해?"
밤의 적막한 공기와 개의 짖는 소리까지도 날카롭게 찢는 목소리. 나는 화들짝 놀라며 피우던 담배를 떨어뜨렸다.
"저 새끼가? 담배까지 펴? 너 빨랑 들어와!"
이런, 씨팔!
눈앞이 아득했다. 젠장, 담배 피우는 것도 잘못 축에 든단 말야? 친구 놈들은 이미 고등학교, 중학교 때부터 다들 담배 피우고 제 방에 재떨이 하나씩 가져다 두고 있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때까지도 담배를 피운다고 어머니한테 죽을 각오를 해야한다니. 제기랄!
나는 동생이 열어놓은 대문으로 들어간 다음 대문을 힘껏 닫았다. 쾅! 하는 육중한 쇳소리가 밤의 적막함을 한 번 더 흔들어놨다. 현관문을 열자 어머니가 앞에 떡하니 팔짱까지 끼우고 버티고 서 있었다.
"너, 담배하고 라이타 내놔!"
"왜 그래요. 이제 담배 정도는 피울 나이라고요."
나는 신발을 벗고 어머니 옆을 피해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그러나 여지없이 어머니의 어깨에 걸리고 말았다.
"이 새끼가? 빨리 안 내놔?"
나는 어깨에 멨던 가방을 바닥에 팽개쳤다.
"정말 왜 그래요--. 가져가서 엄마가 필 거예요?"
"뭐어?"
하는 소리가 끝을 채 감추기도 전에 어머니의 손바닥이 내 뺨으로 날아왔다. 눈에 불이 번쩍했다. 순간적으로 가슴속에서 뭔가가 울컥하고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러나 금방 힘이 풀리고 말았다. 어쩔 것인가. 어머니를 상대로 쌈판 한판 벌여볼 셈이라도 되나? 제기랄. 이 나이까지 어머니한테 맞고 담배를 빼앗기며 산다니.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어머니의 펼친 손바닥 위에 탁 하고 내려놨다. 그리고 일그러뜨린 눈을 치떠 어머니의 눈을 정면으로 쏘아봤다.
"됐어요?"
"너 지금 엄마랑 한판 붙자는 거야?"
"아녜요."
나는 팽개친 가방을 들고 발을 구르며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방문이 부서져라 닫고 손잡이의 조그만 자물쇠를 채웠다.
"씨팔!"
나는 그대로 문을 뒤에 지고 서서 분을 삭이려 노력했다. 문 건너편으로 아버지의 초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큰애 들어왔어?"
"조 자식이 벌써부터 담배를 배웠어요. 당신은 입때까지 애 저런 것도 간수 않고 뭐했어요?"
또다시 시작되는 잔소리.
"사내자식이 담배 피울 수도 있는 거지."
"당신이 맨날 그렇게 담배를 피워대니 애가 배우죠!"
"그애 담배 피우는 게 내 잘못이야?"
"당신 잘못 아니면?"
"당신이 그애 엄마잖아."
"쟤는 당신 아들 아니우!"
"나 혼자 낳았나?"
"이그... 하여튼 지 아버지는 그대로 빼다 박아갖곤..."
문을 통해 들은 어머니의 마지막 말은 묘한 여운이 있었다. 아들이 아버지를 빼다 박은 게 뭐 이상한 일인지. 당연한 그 말은 오히려 아버지의 흠잡기로 이어지고 있는 것 아닌가.
"밥 먹었어?"
문 바로 뒤에서 어머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흠칫 놀랐다. 문고리가 철컥철컥 흔들렸다.
"문 잠궈놓고 뭐해! 사내새끼가 엄마한테 한 대 맞고 삐졌어?"
"됐어요!"
나는 문을 떠나 가방을 들고 책상 앞으로 갔다.
"밥 안 먹을 거야!"
"생각 없어요!"
"나중에 배고프다고 하기만 해봐라, 그냥!"
씨팔...
나는 가방을 방구석에 아무렇게나 팽개치듯 던지고 의자에 가 털썩 주저앉았다. 사실 배는 고팠다. 하지만 이런 집안에 있으면서 식욕이 생긴다는 것은 이상함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나는 책상에 팔꿈치를 괴고 앞을 똑바로 쳐다봤다. 눈앞 책꽂이에 빼곡이 꽂힌 각종 참고서, 문제집, 참고서, 문제집. 그 많은 참고서와 문제집 가운데 절반 가량은 아직 펴보지도 않은 것들이었다. 빌어먹을... 이제 시험까지는 몇 달 안 남은 터였다. 겨우 넉달 정도. 이번에 또 떨어진다면 나는 기필코 집에서 쫓겨나고 말리라. 집에서 쫓겨남은 희비가 엇갈리는 일이었다. 어머니와 동생을 눈앞에서 안 봐도 된다는 기쁨이 있지만, 우선 먹고 자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나는 말로만 듣던 서울역 지하철의 노숙자들을 떠올렸다. 신문지를 깔고 누운 다음 그 위에 신문지를 덮고, 모로 누워 잠을 청한다는 그들. 한둘도 아니고 수명이 지하철 역 여기저기서 제각각 누워 잠을 자는 모습. 그 가운데에 내가 낀다면? 갑자기 몸이 간지러워졌다. 젠장, 폐차장은 어떨까? 폐차 직전의 버스 안에서 먹고자고 하는 사람도 있다던데.
그러나 겨울에는 아무래도 지하철보다 더 추울 것 같았다. 차라리 직업거지로 나서는 것도 좋을 듯. 신문지를 덮고 자면 따뜻하다는 말도 생각이 나고.
제기랄... 그러나 그것은 어머니와 동생에 대한 나의 완벽한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난 대학을 들어가야만 해. 그래야 어머니한테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말을 할 수 있지. 그렇지만... 그래봤자 동생이 더 좋은 대학 들어갈텐데... 그럼 난 다시 시궁창에 처박힌 죽은 쥐 꼴이 될테지... 빌어먹을!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구석에 팽개쳐놓은 가방을 집어들었다. 가방 안에 있는 성문 기본영어, 수학정석, 그리고 학원에서 나눠준 프린트물 등. 이것들을 꺼내 책상 위에 죽 늘어놓고 나는 다시 의자에 앉아서 한숨을 내쉬었다. 공부가 머리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건성으로 성문기본영어의 책장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문 밖에서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가 고함을?
나는 문으로 달려가 바짝 귀를 붙이고 밖의 소리를 엿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고 있었다.
이런... 지구가 멸망하려나? 나는 이제껏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저렇게 소리지르는 것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웬일이시지? 나는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지르는 소리의 내용을 알기 위해 문에 귀를 더욱 바짝 붙였다. 이런, 맙소사! 아버지가 지금 어머니에게 윽박지르는 말의 내용은 바로 나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대입에서 떨어진 것, 그리고 재수를 하면서도 성적이 그닥 오르지 않는 것 등. 그러니까 아버지는 지금 그런 것들이 아버지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라고 어머니에게 강하게 항변하는 중인 것이다. 젠장, 내가 아버지 어머니의 부부싸움의 도마 위에 오르다니.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마치 모든 불화의 씨가 다 내 탓인 듯. 생각 같아서는 뛰쳐나가 아버지 어머니 앞에 서서 그만 하시라고, 나 같은 것 땜에 싸우지들 마시라고, 내가 없어지면 되지 않느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나에게 그럴만한 용기가 없음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무척이나 참담한 심정이 되어 의자에 다시 가 앉았다. 싸움은 계속 되고 있었다. 성문기본영어를 뒤적이는데도 신경은 온통 문밖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싸움에 쏠려있었다. 이제는 무턱대고 서로를 헐뜯는 말들. 아버지도 저런 말도 안되는 억지를 쓸 때가 있었나? 다소 아버지에 대해 실망했다. 아버지는 그저 침착하고 차분하며 논리적이고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는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참담함이 증폭됐다.
쾅!
이런 젠장!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뒤따르는 어머니의 날카로운 목소리.
"어디 가요! 이 시간에!"
"조용히 해! 어딜 가건 내 맘이야!"
거세게 현관문 닫히는 소리. 그리고 잠시 정적.
나는 두 귀를 문밖으로 쫑긋 세우고 신경을 모았다. 갑자기 내 방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어머니의 목소리와 함께. 나는 너무 놀라 억, 하고 낮은 비명을 질렀다.
"이 새끼, 뭐해! 문 안 열어!"
나는 대꾸를 안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할 지도 몰랐고, 어떻게 말을 해야하는 지도 잊어먹었는지도 몰랐다. 그저 책상에 두 팔꿈치를 괴고 두 눈을 휘둥그래 떠 문만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문 안 열어! 디비져 자냐! 으이그, 이 웬수야!"
동생 방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왜 그래. 동네 창피하게."
"내가 이러고 싶어서 이러냐! 두 남자가 내 속을 긁어놓으니까 그렇지!"
아무래도 아버지와 나는 주워온 식구인 듯 했다. 어머니와 동생은 원래부터의 이 집주인이고. 빌어먹을!
"너 빨리 나가서 아버지 안 데려와!"
다시 방문을 뚫고 들어오는 어머니의 날카로운 외침.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방구석에 쭈그리고 앉았다. 도대체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다시 부모님들 사이를 풀고 '정상적인' 집안을 만들 수 있는지는 전혀 머리 속에 없었다. 단지 의자처럼 높은 곳에 앉아있으면 어머니의 눈에 더 빨리 뜨일 것이라는, 그래서 잘 보이지 않도록 구석으로 숨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됐어, 엄마. 내가 나가서 모셔올게."
동생의 낮은 목소리. 그리고 어머니의 마지막 신경질적인 외마디 욕설.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났고 어머니는 안방으로 들어갔는지 조용해졌고 이윽고 TV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여전히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전혀 모르는 채로 그저 그렇게 앉아만 있었다. 모든 인간적인 사고활동을 박탈당한 채, 그렇게 마치 한 마리의 벌레처럼 남들의 눈에 띄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구석에 앉아 있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존재해야할 필요성. 세상에서 하나의 개체로 태어났으면 무엇인가 그에 맞는 역할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 역할에 충실할 때 그 개체는 비로소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되는 것 아니던가.
그런데 나는?
내가 쭈그리고 앉아서 쳐다보는 방바닥 위로 무언가 시커먼 것이 빠르게 지나갔다. 내 눈은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쫓았다. 그것은 빠르게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딱 멈춰섰다. 내 눈도 그것을 따라 멈췄다.
미동도 않고 가만히 있는 그것. 그것은 바퀴벌레였다. 바퀴벌레는 그렇게 죽은 듯이 가만히 있다간 다시 빠르게 움직이더니 장판과 벽이 만나는 선을 따라 쭉 움직여 방문까지 가다가 문지방과 방문의 좁은 틈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내 눈은 그것이 사라진 방문 틈을 보고 있었다. 세상에서 아무런 쓸모도 없는 벌레이지만 가장 생명력이 질긴 벌레라고 하던가, 바퀴벌레가.
문득 나는 내 몸에서 뭔가 길고 끈적이는 것이 빠져나오고 있음을 느꼈다. 어깨에서, 옆구리에서, 골반 뼈의 옆에서. 까맣고 길게 빠져나온 그것은 기름기로 번들거렸고 허공에서 제멋대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 머리에서도 뭔가 길고 가느다란 실같은 것이 두 개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내 머리 위에서 흔들거리면서 주위의 공기를 살폈다. 나는 그 두 개의 더듬이로 주위를 충분히 살필 수 있었다.
화석화한 내 작은 방. 그 방안의 살아있지 않은 모든 물체들. 그리고 살아있는 것들. 그것은 나와 처지가 같은 바퀴벌레였다. 질긴 생명력으로 자기를 죽이려는 모든 것들을 피해다니면서 끝까지 목숨을 이어나가고 있는 작고 까만 바퀴벌레들. 그들은 지금 어머니가 TV를 보고 있는 안방으로 줄줄이 무리 지어 몰려가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까맣고 길고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여섯 개의 다리와 두 개의 더듬이를 바삐 놀리며 그들의 긴 대열 속으로 끼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