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리 길리엄 감독은 참 불운한 사람입니다. <브라질>의 편집권과 개봉을 둘러싼 폭스사와의 유명한 쌈박질 같은 일화는 둘째치고, 그가 감독한 영화들 치고 흥행이 제대로 된 영화가 있나 모르겠네요. <12원숭이>와 <라스베가스에서의 공포와 혐오> 이후 간만에 만든 <그림형제>도 흥행으로나 비평으로나 완전히 조진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형제> 때 스튜디오 간부들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는 이례적으로 <그림형제>가 개봉된 그 해에 이 <타이드랜드>를 만들었습니다. 그전까진 보통 3년 이상의 간격을 두고 영화를 만들었댔죠. 그리고 이 <타이드랜드>는 국내에서는 개봉은 커녕 아직까지 디비디나 비디오로 출시될 기미 조차 안보이고 있습니다. 덕분에 저같은 길리엄 팬들은 2년이나 지난 그의 이 신작을 보기 위해 밤새도록 p2p를 돌려대야만 했죠, 니미.
그렇게 흥행이 안됨에도 불구하고, 테리 길리엄의 영화는 그 자신이 말한 대로 꼭 돈이 많이 드는 영화이곤 합니다. 그가 그동안 보여준 비주얼들을 보자면 거의 대부분 거대한 세트와 무수히 많은 엑스트라들과 초현실적이고 몽환적인 촬영기법이 꼭 들어갔죠. 하지만 <그림형제> 때 데여서 그런지, 이 영화에선 적은 배우, 상대적으로 작은 세트가 쓰였습니다. 물론 마지막 장면에선 버릇처럼 또 스케일을 확 키우긴 했지만 말이죠.
<브라질>, <바론의 대모험>, <12원숭이>, (기억은 잘 안나지만) <피셔킹>, 심지어는 <그림형제>처럼, 이 영화도 한 개인의 환상을 열심히 좇아가는 영화입니다. 그동안 환상을 좇는 주체가 성인남성이었던 데 반해 이번에는 10살 남짓한 여자아이가 그 환상을 좇아갈 뿐입니다.
젤리자 로즈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이 여자아이는 참 불운하기 짝이 없습니다. 록커인 아빠와 침대에 누워 마약과 담배와 초코바만 먹고사는 엄마는 마약중독자고, 학교는 다니지도 않는 것 같으며 엄마와 아빠의 마약시중을 들어야만 하고, 심지어 아빠는 아기였던 젤리자 로즈가 운다고 얼굴에 담배연기를 내뿜기도 했답니다. 이 여자아이의 유일한 친구들은 머리통을 뜯어낸 바비인형들로, 젤리자 로즈는 이 인형 머리들을 검지손가락에 끼우고는 끝도 없는 혼자놀기를 하거나 아빠와 함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하고 30분도 안돼서 아빠와 엄마는 모두 마약과용으로 죽습니다.
<헐리우드의 반 고흐>를 열창하는 노아. 실제로 제프 브리지스는 이 노래를 직접 불렀습니다.
순서: 1.젤리자 로즈-주사기에 마약을 정제해 넣어갖고 온다. 2.노아-팔뚝에 끈을 감고 주사기를 꽂는다. 주사를 다 한 주사기는 그냥 팔뚝에 꽂아둔다. 3.젤리자 로즈-천을 갖고 와 주사기를 뽑고 끝을 풀고 아빠를 의자에 편히 앉힌다.
뭐 충격이라고밖에 보이지 않는 제니퍼 틸리의 모습....
2천년 동안 진흙 속에 묻혀있었다는 보그맨.
아빠의 뒤를 쫓는 보그맨의 그림자
엄마의 죽음
아빠와 젤리자 로즈는 생전에 엄마가 좋아했던 것들을 시체 위에 쌓아놓고는 아빠의 고향집으로 도망칩니다.
아빠의 고향집
.....은 뭐 거의 흉가.....
젤리자 로즈의 친구들
혼자 놀기......
젤리자 로즈는 정제중....
조델 퍼랜드. 94년 생입니다. 연기 아주 그냥 죽음입니다.
다락방에서의 모험...
아빠는 휴가중......
이제 젤리자 로즈는 흉가나 다름없는 시골의 외딴집에 혼자 남습니다. 주위에 남은 건 흔들의자에 앉아 혀를 빼물고 죽어있는 아빠의 시체와 호시탐탐 땅콩버터병을 노리는 개미떼와 달랑 한병 남은 땅콩버터와 지붕을 들락거리는 다람쥐와 철길 옆에 뒤집어져있는 버스의 잔해와 인형머리들 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여자아이, 전혀 슬퍼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하긴, 아빠 엄마에게 학대 아닌 학대를 받으며 살 때도 전혀 주눅들거나 슬퍼하거나 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었죠. 게다가 이 아이는 어쩌면 중증의 폐질환을 앓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미 죽음이니 슬픔이니 하는 것들은 일찌감치 초월했을 수도 있지요. 아니면 거기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던가.
아무튼 주위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묘하게 밝고 활기찬 이 여자아이 덕분에 영화는 더더욱 꺼림칙합니다. 게다가 수시로 넘나드는 환상 속의 세계 역시 암담해보이기만 합니다. 그 환상 속에서 흉가의 다락방에 있는 옷장은 깊은 동굴이고, 그래도 보금자리라고 할 수 있는 그 흉가는 보는 앞에서 땅 속으로 기우뚱 쓰러져버리는가 하면 젤리자 로즈 역시 끝을 알 수 없는 토끼 굴 속으로 떨어져버리기도 합니다. 내장을 모두 끄집어낸 아빠의 뱃속에선 인형머리들이 날아다니고 잃어버린 가장 친한 인형머리를 한 엄마가 흔들의자에 앉아있기도 하네요. 기괴하기만 한 이 환상장면들은 그러나 테리 길리엄의 연출에 의해 오히려 아름답게만 묘사됩니다. 또한 이 모든 환상들은 다 10살짜리 여자아이의 머리속에서 나온 것들이죠. 끔찍한 현실이 아이의 머리속에 있는 아이스러운 필터를 거치면서 아름다운 환상이 됩니다. 어른의 시각으로 보자면 이보다 더 불쌍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아이들은 어느 상황에서도 놀거리를 창조해내는 능력을 갖고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환상들은 테리 길리엄이 이전에 만들었던 다른 영화들에서 볼 수 있었던 환상과는 좀 다릅니다.
하지만 이렇게 환상 속에서 즐겁게 놀다가 아마도 굶어 죽었을 젤리자 로즈는 이웃집의 남매에 의해 목숨을 건지고 동시에 현실의 비극과 마주치게 됩니다. 정서적으로 큰 문제가 있고 젤리자 로즈의 아빠인 노아의 옛연인인 박제사 델과, 정신지체자인 동생 디킨즈가 바로 그 남매들이죠.
델은 썩어가는 아빠의 시체를 박제로 만들고 흉가나 다름없던 집을 그래도 볼만하게 꾸며줍니다. 하지만 젤리자 로즈는 첫만남에서 자기를 반달(Vandal, 옛날 유럽에 쳐들어가서 모조리 다 부숴버려서 반달리즘이란 말을 만들어낸 반달족)이라고 부르는 이 아줌마를 제멋대로 친구로 규정해버립니다. 그리고 자기 혼자서 그와 즐거운 소풍을 간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이 아줌마는 냉혹한 현실주의자입니다. 돈이 없으면 어리버리한 슈퍼마켓 배달원에게 자기 몸을 대신 지불할만큼 말이죠. 젤리자 로즈는 슈퍼마켓 배달원과 델의 정사를 훔쳐보며 델을 한마디로 정의해버립니다. [흡혈귀].
하지만 델 역시 현실 위에 제대로 발 붙이고 살아가는 인물은 아닙니다. 검은 안경으로 벌에게 쏘여 실명한 오른쪽 눈을 가리고 항상 검은 상복을 입고 다니는 그는 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과 적의를 가지고 있으며 어릴 적 사귀었던 노아에 아직도 집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게다가 벌에 쏘여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자기 어머니의 시체를 집안 한 곳에 고이 안치해놓기도 하죠. 그와 반대로 이미 죽은 자기 아버지나 낯선 외부인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반감을 드러내고 그것을 폭력으로 발산시킵니다.
델의 남동생 디킨즈로 오면 더 암담해집니다. 간질 때문에 뇌수술을 받고나서 어린 아이 수준의 지능에서 멈춰버린 그는, 정서적으로 문제있는 누나에게서 학대받으면서 자랐고 스스로를 함장이나 잠수부이라고 믿으며 집 한곳에 온갖 잡동사니를 다 모아다 놓고 천막으로 뒤집어씌운 후 그것을 자기의 잠수함 리사라고 부릅니다. 또한 집 근처를 지나는 열차를 괴물상어라고 부르며 호시탐탐 상어를 사냥할 궁리를 합니다.
...아빠는 아직도 휴가중..... 이지만 현재로선 젤리자 로즈에겐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어른입니다.
여전히 혼자 놀기...
아빠를 되살리기 위한 나름 노력...
델의 거의 항상 저러고 다닙니다.
젤리자 로즈는 제멋대로 델과의 소풍을 계획하고 친구들인 인형머리들도 놓고 갑니다.
멀리 보이는 델의 집
그리고 불쌍한 디킨즈
젤리자 로즈와 디킨즈의 첫만남. 디킨즈는 잠수부 복장을 하고 마치 수영하는듯 팔을 움직이며 걸어다니죠.
디킨즈의 잠수함 리사의 내부
애플 사이트에서 처음 예고편을 봤을 때부터 날 홀랑 빠지게 했던 집의 잠수장면. 지금까지 본 영화 가운데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입니다.
잠수해서 델의 집까지 헤엄쳐 간 젤리자 로즈는 디킨즈를 학대하는 해적선장 델을 보게 됩니다. 데비 존스는 <캐러비안의 해적> 2편에서도 나왔죠. 대충 바다의 악마.. 뭐 그런 뜻이라더군요.
델은 흡혈중...
토끼굴로 빠져버리는 인형머리 무스티크
가장 좋아하는 무스티크를 잃어버리고 상심에 빠진 젤리자 로즈
디킨즈는 괴물상어를 잡기 위해 저런 위험한 장난을 합니다. 선로 위에 산탄총알을 올려놓고 있죠.
토끼굴 속으로........
토끼굴 속으로.....................
수십년만에 노아와 재회한 델
네.. 델의 직업은 박제사입니다.
뱃속을 드러낸 노아
델은 노아의 흉가를 깨끗하게 단장해줍니다. 노아와 그의 딸을 위해서.
젤리자 로즈가 아빠의 뱃속에서 본 엄마
젤리자 로즈와 디킨즈의 행복한 한때.....
젤리자 로즈는 디킨즈라는 이 유사 아이에게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만약 디킨즈 역시 진짜 아이였으면 둘의 사랑은 어떤 식으로든 결말을 맺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디킨즈는 어른의 육체에 아이의 지능을 가진-어떻게 보면 아이보다도 못한- 사람인 게 문제죠. 그리고 이 영화에서 어른은 유일한 아이인 젤리자 로즈의 환상을 현실로 끌어내리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젤리자 로즈는 어른의 눈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디킨즈의 육체가 어른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맙니다. 당연히 둘의 사랑은 델의 분노를 일으키고 한바탕 난리 끝에 결국 디킨즈는 위험한 상어사냥을 실행에 옮기고 말지요. 그 결과는 대형사고로 현실화됩니다.
디킨즈의 對상어용 무기
그들의 행복한 시간
젊은 시절의 노아와 델
한바탕 난리가 있고, 젤리자 로즈는 박제화된 델과 디킨즈의 어머니 시체를 망가트립니다.
아빠에게 돌아와 하소연하는 젤리자 로즈
디킨즈의 상어사냥을 눈치챈 젤리자 로즈는 미친듯이 아비규환 속에서 디킨즈를 찾습니다. 그리고 찾았나 싶었는데.....
젤리자 로즈 또래의 딸을 잃어버린 한 아줌마. 영화는 이 아줌마의 대사로 끝을 맺습니다.
*본 포스팅에 쓰인 스크린샷 이미지의 저작권은 Capri Films에 있습니다.*
조니 뎁을 기용해 찍었던 <라스베가스에서의 공포와 혐오>가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고 그 뒤에 만든 <그림형제>가 흥행과 비평에서 모조리 죽을 쑨 뒤 바로 만든 이 영화는 간만에 테리 길리엄스러운 영화라고 할만 합니다. 유머가 많이 모자라긴 하지만 여전히 그는 비극을 비극처럼 만들지 않고 환상을 동원해 적절하고 아름답게 포장했지요. 걸작까지는 아니더래도 수작의 반열에 들만한 이 영화가 국내에선 디비디 발매 또한 희미해보이는 게 그저 안타깝기만 합니다. 게다가 한글자막 구하기도 하늘의 별따기라, 간신히 구한 영어자막을 블러드님에게 부탁해 번역을 부탁하기까지 했지요. 아무튼 요샌 개나소나 대자본의 블럭버스터가 아니면 좋은 영화 구해보기도 힘든 세상이 돼가고 있는 거 같습니다.
OST 가운데 <Corn Swimming> by Mycheal Danna
덧, 테리 길리엄은 <그림형제>를 끝내고 6달만에 이 영화를 만들었답니다. 그는 이번에도 미라맥스의 하비 웨인스타인과 영화의 최종편집본을 놓고 한바탕 싸웠다는군요. 영화의 결말을 보자면 아무래도 이번에도 테리 길리엄의 승리인 거 같습니다. 테리 아저씨 짱!
그리고 영화의 원작자인 미치 컬링(Mitch Cullin)이 초반부의 버스 장면에서 카메오 출연한답니다. 원작을 못봤고 원작자가 누군지도 모르니 패쓰. 노아의 시골집 우체통엔 [M.Cullin]이라는 이름이 씌여있다는군요.